소설가의 에세이_나의 미발표작
나는 지금 영원히 발표되지 않을 것에 대해 쓰려 한다. 나는 소설을 쓰는 소설가이지만 시시때때로 시와 산문을 써 내려간다. 시와 산문 모두 꽤 모아 놓은 편이지만, 어딘가에 내보이거나 발표할 생각은 한 적이 없다. 그저 내게서 발산한 무언가를 문장으로 가둬놓는 일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뿐이니까. 소설가가 되기 전까지도 어떤 형태의 글이든 써가곤 했으니까, 소설이 아니더라도 무엇이든 쓴다. 즉시적인 감흥이 떠올랐을 때 그것을 어쩌지 못하고 메모하곤 하던 게 시가 된 것 같다. 직설이 아닌 어떤 은유의 형태로 내게 남은 시. 하지만 그것이 정말 시의 형태를 띠고 있는지는 정말 알지 못한다. 한 번도 시라는 것에 대해 배워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 '패터슨'에는, 패터슨 시에 사는 버스 드라이버 패터슨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아침에 출근해 동료의 하소연을 들어주며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고,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먹고 퇴근을 하면 강아지를 산책시키다가 바에 들러 맥주를 마신다. 조금씩 다르기도 하지만 대체로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을 살아간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그가 빠트리지 않고 매일 하는 행위는 노트에 시를 쓰는 일이다. 그는 매일 다르게 읽히는 사물과 일상을 날것으로 포착해 시로 써나간다. 그의 아내는 틈틈이 노트에 써놓은 시들을 모아 언젠가는 출간해야 한다고 그에게 조언한다. 아내는 패터슨이 얼마나 시를 아끼는지 알고, 그가 써놓은 시들을 좋아한다.
쓰는 행위로 존재하는 삶, 그리고 시로 그려지는 일상들. 사람들에게 무감하게 읽히는 일상의 이면을 써내려 가는 패터슨. 그는 버스 안에서 펜과 노트를 놓지 않고, 매일 그리고, 언제든 글을 쓴다. 매일 같이 벌어지는 사소한 갈등과 한계를 토로하는 동료의 말들이 지나가면, 자기 안에서 떠오른 낱말들을 이어 문장을 만들고 순간을 기록하듯 시를 쓴다. 그가 쓰는 시 속의 낱말은 일상 안에서 발견되거나 발췌되어 자신만의 언어로 변주된다. 평범한 일상을 매일 같이 다르게 채색한 그 일상을 패터슨은 살아간다. 마치 시 속에 살기 위해 일상을 살아가려는 사람처럼.
나 역시 패터슨처럼 시를 쓰곤 한다. 어디에도 발표하거나 출간할 계획 없이.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을 시를, 별 뜻 없이 써가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영 그것에서 멀어질까봐. 소설가인 나는 소설 속 누군가의 목소리를 빌려 이야기를 해나가지만, 시는 오롯이 내 안에서 액과처럼 영근 목소리로 쓰이는 것 같다. 삶의 여백을 분주하게 뭔가로 쌓아놓다 보면 어느새 시는 내게서 멀어져 있다. 즉시적으로 떠오른 낱말을 지나치는 걸 반복하면, 아무것도 오지 않는다. 일상은 어제의 일상과 다름없이 흐르고 나는 건조해진다. 다름 아닌 ‘시’라는 수분과 즙액을 나는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내 안의 어떤 필요로 시를 써가고 있는 것 같다. 몇 개의 낱말이 떠올랐을 때, 즉각적인 감흥이 떠올랐을 때 그것을 써내지 못하면 사라지고 마는, 일상의 여백을 갉아먹고 마는 그것이 내게는 시인 것 같다.
여백을 잃을까 봐, 시를 써가는 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아니면 시 자체가 여백인 것일까. 가끔 일상이 건조해지고 시에서 멀어지곤 하면, 버스와 벤치에 앉아 펜을 돌리는 패터슨을 생각한다. 사각거리며 써가는 종이 위의 질감이 떠오르고, 나도 그 언어들을 따라 내가 지었던 음절들의 유의미성에 대해 생각한다. 패터슨 시에 사는 퍼터슨이 자주 떠오르는 건, 나도 그처럼 시를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시를 쓴다는 것만으로도, 그 평범함이 나를 비일상적으로 존재하게 한다.
그러나 일상에 쌓이는 것은 시, 뿐만은 아니다. 패터슨의 아내는 좋은 기타를 사기 원하고 재능이 있는 쿠키 만들기 솜씨를 이용해 컵케이크 비즈니스도 하고 싶어 한다. 매일의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오늘과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경제적 비용이 필요하고 원하는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많은 시간과 자본이 필요하다. 타인과 교감할 수 있는 시간 역시 필요하다. 그러니 원하는 대로 시를 써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다만 패터슨처럼 나 역시 일상의 조각조각을 찢어낸 틈 사이에서 시를 써가고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내가 원하는 방식의 일상을 조금은 살아내었구나 하는 안도감으로 충만해질 뿐이다.
어느 날 패터슨은 강아지 마빈이 시를 적어놓은 노트를 갈기갈기 찢어놓은 걸 발견하게 된다. 평범한 일상 속의 우주이자 매일 다른 영감으로 써온 기록과도 같은 그 시들을. 같은 듯 다른 일상을 견디며 살아가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아내의 말대로 시집을 내서 시인이 되는 그런 꿈마저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노트가 사라지고 기운을 잃은 채 자주 가던 폭포 앞에서 힘없이 앉아 있던 패터슨에게 한 일본 시인이 다가와 말을 건다. 그는 윌리엄 카를로스에 대해 얘기하다가 빈 노트를 주며 말한다. “때로는 텅 빈 페이지가 더 많은 가능성을 선물하죠(Sometimes empty page presents more possibilities).” 나는 그 장면을 보다가 생각한다. 내 마음처럼 되지 않는 세상의 일들. 때론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쉽게 원하는 것을 얻기도 하고, 예상치 않게 도움을 받기도 하고,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잃어버리고 실패하고, 기대했던 것보다 도움을 얻지 못한다. 예상치 않은 좋은 일들도 있고 기대보다 나쁜 어려운 일도 같이 존재한다. 대체로 세상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패터슨은 일상을 다르게 기록하기 위해 시를 써간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저 일상의 여백 안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써간 게 아닐까. 어쩌면 내게 영원히 발표되지 않을 언어와 문장과 시적인 언어들도 그런 게 아닐까. 비록 누군가에게 닿을 수 없지만 내게 보는 것보다 가진 것보다 큰 가능성의 선물을 받을 여백을 만들기 위해 쓰는 건 아닐까. 창밖에 비구름이 몰려오는 것이 보인다. 태풍과 비구름이 아주 오래 지속되고 끝내 자신을 덮어쓸 것이라는 두려움. 창밖의 비구름에 자신을 투영하다 보면 그렇게도 생각될 때가 있다. 비구름을 벗어날 가능성 같은 건 없는 거야. 가능성이 없다고 자각하는 상태가 우울함이 아닐까.
뭔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들에 계속 집착하고 있는 건, 어쩌면 찢겨 산산조각 난 패터슨의 노트 종이들을 맞춰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마음을 비우고 노트를 펼친 채, 아무것도 없는 그 여백 위에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의 일상 속에서 발견한 것에 대해 쓰다 보면, 작은 가능성의 선물이 다시 마음속에 잔잔히 떠오르는 것 같다.
그렇게 가능성의 선물로 다가온 나의 시를, 처음으로 여기에 기록해 두고자 한다.
응시는 기억을 희박하게 하고
채기성
너는 숲그늘 아래의 얼굴
잎맥이 창백한 이파리처럼 각인된 서릿한 핏줄
파편처럼 조각난 혈맥 안은 투명하고
너의 얼굴 밑 드리워져 흔들리다 떨어진 작은 수목가지를 주워 들어
흙바닭에 그려 나간 검은 그늘
본 적 없는 그 얼굴
달처럼 부푼 얼굴과 갸름하고 긴 그림자
번들거리는 잎 너머 보였다 사라지는 눈동자
그 자리를 메꾼 투명한 기억은 자기 몸으로 잎들을 끌어안고
나는 그 기억을 지나치다
그건 꿈이다 여기려다 그러지 못하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발자국을 남기는 흔적을 좇다
과녁으로 향하며 분절하는 시간을 더듬거리다
우리는 모두 사라지는데 너는 흔들리는데 왜 바람은 흔들리지 않아
그건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어서니까
남길만한 무엇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남지 않으니까
생각과 바람은 말이 되어 속삭이느라 소란스럽고
풀잎은 자지러지고 벌레가 파먹은 액과의 과즙은 입술에 묻어 흔들려
모든 건 썩어가며 긴 싹을 내는 동안 동시에 그 자리에 머물고
돌아가도 돌아가지 않아도
그 자리에서 기다리면 모든 것은 그대로이고
우리는 차츰 걷어진 빛처럼
사라지고 마는걸
얼굴이 잘려 미움이 되는 꽃말
자잘하게 박힌 검버섯처럼 마음에 피어난 곰팡이
선연한 응시가 그려낸 그늘
채기성
201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 장편소설 『부암동 랑데부 미술관』 『우리의 길은 여름으로』 등이 있다. 장편소설 『언맨드』로 세계문학상을, 『못갖춘마디』로 사계절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반음』으로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