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나름 Sep 23. 2023

섬머 로스 증후군

스누트 9-10월 · 2회 │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가을

  아침 샤워를 하다 온수로 살짝 손잡이를 민다. 선풍기를 끌어 다 놓지 않아도 헤어드라이어 바람이 덥지 않다. 가을이다.


  생애 첫 계절은 여름. 나는 8월의 대구에서 태어났다. 태교가 태닝이었는지 날 때부터 까무잡잡했던 피부는 간절기 강아지 털갈이 마냥 내 계절만 되면 별일 없이도 까매졌다. 어중간한 옷 자국이 싫은 여름엔 검정 끈 슬리브리스가 제2의 피부. 스티브 잡스도 하와이에 살았다면 나랑 똑같이 입었겠지? 아이폰 이모지도 동기화 완료! 표정과 손은 노랑 대신 우측 두 번째 갈색이 디폴트다. (한여름에만은 최우측!) 회사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으로 쓴 글의 까만 따봉을 보고 협력사 대표도 내가 쓴 줄 알았단다. 나는 모바일 세계에서도 여름 인간 그 자체다.


  두 번 탁탁 개면 손바닥만 해지는 옷가지와 뒤꿈치 까질 염려 없는 슬리퍼. 땀으로 번진 얼굴도 선글라스와 탠저린색 립틴트면 그저 그만인 여름의 질량. 그렇게 떠나는 물속이 좋다. 나는 여름의 질감마저 사랑한다. 하늘 대신 달려와 안기는 동해의 파도. 갯벌을 덮고 노을을 업은 서해 간조. 녹음을 가르는 바람에 여전히 뼈까지 시린 계곡 낙수. 웨스 앤더슨 색감의 파란 타일과 하얀 줄눈이 일렁이는 풀. 그 너머 한남동 회색 뷰의 그랜드 하얏트 수영장. 풍덩! 볕에 달아오른 몸을 던진다. 코가 시큼하고 귀가 먹먹하도록 물을 먹어도 멈출 수 없다. 채 백 일이 되지 않는 이 여름날에 나만의 새순이 돋고, 낙엽이 지고, 적설이 두터웠다 사라진다. 하지점으로 점철되는 나의 일 년.

   

  양말을 꺼내 신고 저녁 산책을 나선다. 낮에 뿌린 우디향이 가을바람에 퍼진다. 와인바 테라스에서 까베르네 쇼비뇽 한 잔하면 좋을 온도와 습도. 주문은 메뉴판 맨 위의 것으로. (위에 있을수록 맛도 가격도 가벼우니까.) 하지만 벌써 지난 달의 경리단길 <후렌드치킨> 생맥주가 그립다. 한낮의 열기가 끈적하게 내린 퇴근 시간, 파란 플라스틱 의자를 드르륵 당겨 앉아 포크 두 개 양손에 쥐고 옛날 통닭 허벅다리 살을 찢었던. 깨소금 후추를 콕 찍어 맥주 한 모금 뒤를 배웅하는 맛. 그 사이 서머 로스 증후군이 시작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하는/사랑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