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앉아서 쑥에 불을 붙이고 누른다. 놀기 좋아하는 내가 하루 종일 앉아서 아픈 몸을 치료하고 있으려니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다. 물론 답답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도 아픈지 1년 정도 지난 후였다. 그 전에는 통증에 사로잡혀 아~무, 정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쑥뜸 치료와 병행할 수 있는 놀거리가 없을까 슬슬 찾기 시작했다.
제일 처음엔 책을 봤다. 그러나 책장을 넘길 손이 없는 게 문제였다. 쑥찜 한 방을 다 하고 나서야 노는 손이 생겼는데 그 사이 눈은 이미 글씨를 다 읽어버려 무료해하고 있었다. 게다가 한 번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 후에 다시 책으로 돌아오면 어디를 읽었는지 눈으로 더듬으며 찾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래서 비교적 한 페이지에 글씨가 많은 신문을 보기 시작했는데...... 비슷했다.
그래서 찾은 것이 영화였다. 쑥뜸원에서는 사람들이랑 같이 있으니까 못 보고 집에서 치료할 때만 봤는데... 와... 꿀맛! 아프기 전에는 영화를 보고 싶어도 바빠서 못 봤는데 지금은 눈을 둘 곳이 영화밖에 없으니 몰입도가 엄청났다. 영화는 잠깐 한눈을 팔아도 귀로 들으면 되고 한번 플레이 해놓으면 손 쓸 일이 없으니 쑥뜸과 병행할 수 있는 최적의 놀이였다.
하루에 한 편 정도를 보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4년을 보면서 영화에 완전 미쳐버렸다. 아프기 전에도 단편 영화나 예술 영화를 좋아했는데 지금은 모든 분야를 두루 즐기게 됐다. 극본, 연출, 음악, 배우의 연기가 눈에 쏙쏙 들어오고 자잘한 디테일에 몸을 바르르 떨며 열광한다. 영화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재미있어진다.
쑥뜸하면서 영화를 볼 때 나도 모르게 영화에 몰입해버려서 불을 허공에 한참을 쏘고 있거나 다 식은 쑥을 몸에 한참 대고 있을 때도 있었다. 쑥이 아닌 솜에 불을 쏘는 바람에 태워먹은 솜이 한 트럭은 되지 아마? 내가 사용한 토치는 다이아몬드를 녹이는 아주 강력한 불이 나오는 라이터 토치였는데 살에 쏘지 않은 걸, 집을 태워먹지 않은 걸 천만다행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아픈 덕분에 아픈 영화를 볼 수 있게 됐다. 그 전에는 아픈 사람들 이야기를 못 봤다. 왠지 무섭고 기분이 안 좋아져서. 그런데 이제 아픈 건 내 이야기이자 사람들의 그냥 사는 이야기인 걸 알게 됐다. 이 세상 곳곳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내 현실이 확 아파버리니 내가 수용할 수 있는 고통의 한계치도 확 커져서 담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아졌다. 이것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예술을 즐기는 나에게 엄청난 전환이고 축복이다.
내가 예전에는 못 봤지만 지금은 볼 수 있고 크게 감동받은 영화들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2003. 일본 #장애인 #사랑 #독특함 #일본음식)
-룸 (2015. 아일랜드. #납치 #실화 #성폭력 #생존 #트라우마 #극복 #사랑 #브리라슨주연)
-소년 파르티잔 (2015. 오스트레일리아. #아동학대 #살인청부 #아이들 #미래)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 (2017. 일본 #트랜스젠더 #사랑 #가족 #독특함 #코믹)
-플로리다 프로젝트 (2017. 미국. #성매매 #귀여운6세꼬마 #육아 #분노)
-세자매 (2020. 한국. #자매 #가정폭력 #정신질환 #분노)
깊은 섬세함에 빠져들어 솜을 태우고 손까지 태울 뻔했던 영화들은
-바그다드 카페 (1987. 독일. #여성 #독립 #사랑 #자유 #마법 #과감)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 (2014. 프랑스. #최면술 #상처와추억 #예술 #역시프랑스)
-보이후드 (2014. 미국. #성장기 #10년동안촬영 #가족 #사랑 #감동 #배우들이같이늙어감)
-단지 세상의 끝 (2017. 프랑스, 캐나다. #자비에돌란감독 #가정불화 #심리 #시한부 #눈빛)
-칠드런 액트 (2018. 영국. #소년법 #시한부 #죽음 #여호와의증인 #분노 #슬픔)
-베이비티스 (2019. 오스트레일리아. #시한부 #죽음 #사랑 #순수 #양아치남자 #애잔)
보고나서 한참을 미소 지으며 행복감에 젖어 있었던 영화들은
-행복 목욕탕 (2016. 일본. #가족 #시한부 #감동 #눈물)
-레이디 버드 (2018. 미국. #청소년 #성장 #독립 #여성 #웃음 #시얼샤로넌 #티모시샬라메)
-벌새 (2018. 한국. #고딩 #여성 #성장 #사랑 #사춘기 #공감 #애잔)
-남매의 여름밤 (2019. 한국. #가족 #성장 #여름 #잔잔 #촉촉)
-어디 갔어, 버나뎃 (2019. 미국. #여성 #독립 #사회성제로 #건축가 #자유회복)
-작은 아씨들 (2019. 미국. #고전 #가족 #자매 #사랑 #성장 #소설가)
나에게 새로운 통찰을 가져다 준 영화들은
-칠드런 오브 맨 (2006. 영국, 미국. #인류종말 #미래 #인간프로젝트 #아기구출)
-더 로드 (2009. 미국. #미래 #좀비 #생존자 #아버지와아들 #엄청난사랑 #희망)
-북극의 후예, 이누크 (2010. 그린란드. #북극 #변화 #생존 #희망 #강요되는적응)
-말리 (2012. 미국, 영국. #밥말리 #자메이카 #흑인해방운동 #민중의권리 #음악)
-그래비티 (2013. 미국, 영국. #우주탐사 #우주표류 #삶 #가족)
-사도 (2014. 한국. #영조와세자 #왕위계승 #비극적인가족사 #유아인)
-이브 생 로랑 (2014. 프랑스. #디자이너 #조울증 #동성애 #예술)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 (2014. 미국. #피아니스트 #소박함 #즐김 #에단호크)
-동주 (2015. 한국. #창씨개명 #시 #우정 #독립운동 #시대의비극 #강하늘)
-우리 선생님을 고발합니다 (2016. 슬로바키아. #1983년 #학교공산당 #독재 #갈등)
-댄서 (2016. 영국, 미국, 러시아연방, 우크라이나. #최연소영국로열발레단수석무용수 #고뇌)
-댄싱 베토벤 (2016. 스페인, 스위스. #베토벤교향곡제9번 #합창 #무용 #협업 #감동)
-옥자 (2017. 한국, 미국. #봉준호 #동물실험 #동물보호단체ALF #슈퍼돼지 #감동)
-허스토리 (2017. 한국. #1992년부터 #6년간의재판 #위안부 #생존자할머니들)
-언더독 (2018. 한국. #유기견 #스트릿라이프 #동물인권 #웃음 #감동 #미안함)
-말모이 (2018. 한국. #1940년대 #우리말금지 #전국의말모으기 #사전 #유해진 #윤계상)
-그린 북 (2018. 미국. #1962년미국 #흑인피아니스트 #인종차별 #우정 #웃음 #감동)
-항거 (2019. 한국. #1919.3.1. #만세운동 #유관순 #8호실여성들의1년 #고아성)
-크루엘라 (2021. 미국. #천재디자이너 #비극적가족사 #패션 #파격 #우정 #복수)
이 영화 제목들만 봐도 심장이 뛰고 그 영화의 색감과 느낌들이 마음 안으로 스며든다.
몸이 어느 정도 나은 지금은 예전처럼 하루에 한 편은 못 보고 일주일에 두 편 정도의 영화를 본다. 그리고 쑥 냄새가 진동하는 방에 앉아 작은 노트북 속의 화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영화관에 가서 본다. 쑥찜을 하면서 영화를 볼 때 늘
‘아! 이 영화를 큰 스크린으로 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아쉬움이 있었기 때문에 그 한을 풀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에 영화를 본 후에는 영화 잡지에 실린 기사나 평론을 찾아보며 그 영화의 앞 뒤 이야기를 듣고 나도 그 영화에 대한 감상평을 써본다.
영화에 미친 덕분에 생긴 꿈이 있다. 내가 쓴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들어 칸영화제에서 작품상을 받는 것. 올 해 코로나 때문에 2년 만에 칸 영화제가 열렸는데 우리나라의 봉준호 감독이 개막식 선언을 했고 배우 이병헌이 폐막식 여우주연상 시상자였고 배우 송강호가 심사위원이었다. 그러니 내가 칸에서 상을 받는 것은 상상에만 그칠 일이 아니다. 한국 영화와 영화인들이 칸에서 대단한 입지를 굳히고 있다. 정말 놀랍고 자랑스럽고 고맙다.
칸에서 상을 받는 날 봉 감독님과 전화로 통화하는 상상을 한다.
“록아, 축하해! 드디어 너도 칸 피플이 되었구나.” (우리는 이미 친한 사이라는 설정이다)
“감독님 덕분이에요. 올해 칸영화제 굿즈 전부 사갈게요.”
아....... 그냥 좋다.
나의 아픈 시간을 함께 해준 영화에게 진 빚을 내가 만든 좋은 영화로 갚고 싶다.
영화야 고맙다. 진짜 진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