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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쑥뜸원 사람들

by A록


우리 마을에서 열렸던 선생님의 쑥뜸 수업이 끝난 후에 나는 선생님 댁 옆으로 이사를 해서 선생님 댁으로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그러다가 선생님이 쑥뜸원을 여셨고 그곳에 3년 정도 다니며 치료를 받기도 하고 자가 치료실에서 내가 스스로 내 몸을 치료를 하기도 했다. 아침 열 시에 가서 네 다섯 시에 집에 돌아왔는데 몸이 안 좋은 날은 더 일찍 가서 더 늦게 왔다.


점심은 각자 가져온 반찬과 쑥뜸원에서 한 따뜻한 밥을 같이 둘러앉아 먹었는데 늘 진수성찬이었다. 제주도의 전통 음식을 쑥뜸원에 다니는 4년 동안 거의 다 먹어봤다. 제주 할망(할머니)들의 음식이 얼마나 맛깔나고 깔끔한지 나는 늘 “음~! 와~! 이야~~!” 하고 감탄하면서 그릇에 코를 박고 밥을 먹었다.


그러면 할망들은 (할머니들은)

“니 이거 처음 먹어 봔?” (처음 먹어 봐?)

“기? 무사 경 맛남쪄?” (그래? 뭐가 그렇게 맛있어?)

“하영 먹으라이.” (많이 먹어라)

하면서 음식을 계속 떠주고 등을 쓸어주고 먹는 모습을 웃으면서 바라봐주었다. 즐거웠다.


그리고 언어 공부를 좋아하는 나는 거기서 제주어를 배웠다. 2년은 리스닝, 나머지 2년은 초급 스피킹까지. 어느 날은 식당에 들어가는데 문에 ‘미세요’, ‘당기세요’ 대신 ‘밉써.’ ‘당깁써’라고 제주어로 쓰여있어서 밥을 먹기도 전에 그 식당이 좋아졌다.


아침에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나는 쑥뜸원에 등원을 해서 치료를 한 시간 받는다. 죽기 직전까지의 고통이 난무한 테이블데스를 견디고 내려온다. 너무나 힘들고 지치고 낫고 있는 건가 불안하지만 내 곁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괜찮냐?”

“니는 독하다이. 소리 한 번 안 지르고 그걸 참음시냐.”

그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 손을 들어 죽다 살아났다는 의미로 목을 긋는 제스처를 취하고 할망들은 까르르 웃는다.


나는 그들과 나이 차이를 느끼지 못 했다. 차이라면 피부의 질감 차이? 그들의 피부가 내 피부보다 조금 더 쭈글거릴 뿐이었다. 어떤 말도, 어떤 마음도 다 나눌 수 있는 친구였다. 오늘은 어디가 더 아프고 어디가 덜 아프고, 그래서 마음이 어떻고... 서로의 통증에 대한 대화가 특히 많았는데 나는 그런 말을 쑥뜸원 밖에서는 일절 하지 않았다. 이해받을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느껴보지 않으면 모르는 통증이니까.

류마티스 관절염 투병 기간 5년 동안 4년을 쑥뜸원에서 동지들과 함께 보냈다. 같이 먹고 같이 얘기하고 같이 치료하고 가끔은 싸우고 토라지고 그러다 화해하고. 날씨가 좋은 날은 외식도 하고 소풍도 가고 고사리도 같이 꺾으러 가고. 공동구매로 딸기나 단호박 같은 것도 사고. 각자 가져온 귤은 겨울 내내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그곳에서 나는 내 몸만 치료한 게 아니라 마음도 치료했다. 내가 뭘 해도 깔깔깔 웃는 할망들과 정말 신나게 끈끈하게 지냈다. 혼자였으면 견디지 못했을 수많은 순간을 그들과 함께 해서 견디고 넘어갔다. 아무리 아파도 쑥뜸원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시 치료하고 웃고 먹고 얘기하고 언젠가 나을 것이라 어렴풋이 기대하며 웃을 수 있었다.


2년 전 겨울에 내 몸 상태가 갑자기 너무 악화되어서 치료용 침대에 혼자 누울 수도, 일어날 수도 없을 때가 있었다. 치료가 끝난 후에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치료용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자 할망 한 명이 만둣국 끓여놨으니 같이 먹자고 하셨다. 선생님이 일으켜 주셔서 앉았고 할망의 부축을 받으며 거실로 나가 할망이 떠먹여 주는 만둣국을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손가락, 손목, 팔꿈치가 아파 숟가락을 들기가 힘들었는데 그걸 알고 떠먹여 준 것이다. 그 때 정말 많이 울었다. 내가 꼭 나아서 쑥뜸원 사람들을 위해 뭐라도 해야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는 순간이었다.


4년이 40년, 400년 처럼 길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좋았다. 쑥뜸원 사람들이 있어서 그나마 즐겁게 마음 편히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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