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2시에 일어났다

by A록

오후 2시에 일어났다.

그것도 남편이 귀가하는 소리를 듣고 깬 것이고 아마 가만히 두었으면 더 잤을 것이다.

나는 한참을 꿈속에서 과거에 알던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깨어나서 본 시곗바늘의 위치가 너무 낯설어 잠시 당황했지만

나는 이내 배고픔을 알아차리고 사과와 참외를 한 알씩 씻어서 현관문을 열고 나가

나에게 익숙한 풀과 꽃과 나비를 바라보며 사과와 참외를 깎아 먹었다.


단편적인 파란 하늘을 풍성하고 신비로운 하얀 구름이 입체적으로 장식해주고

나비들은 작고 하얀 꽃 속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꿀을 열심히 빨아먹고

언제 자랐는지 모를 강아지풀이 잔디밭 구석에 군집을 이루고 피어올라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에 복실복실한 머리를 흔들고 있었다.


'2시... 2시에 일어났네...'


생각 한 토막을 사과 한 입과 함께 씹어 삼켰다.

그리고 또 한참을 아무 생각 없이 나와 다른 생명체들을 바라보며 사과와 참외를 먹었다.


'나 성공했네... 성실병에서 드디어 벗어났어...!'


또 다른 생각을 참외 한 조각과 함께 씹었다.


나는 20대에 뜨는 해 보다 늦게 일어나 본 적이 없었다.

늘 뭔가에 쫓기듯 잠자리에 들 때도 손에 책을 들고 책과 함께 고꾸라져 잠들었다가

알람 소리가 시작하자마자 벌떡 일어나 세수를 하고 운동을 하러 나가는 사람이었다.


그 무렵 영어 강사 일을 하고 있었는데

'sweet dream~'이라는 잠자리 인사가 어느 날 너무 생경해서

강사실에 있는 강사들한테 도대체 스윗 드림이라는 말이 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나는 한 번도 달콤한 잠을 자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잠은 최소한으로 쓰러지지 않을 만큼만 누려야 되는

성공과 성실을 망치는 쓰디쓴 어떤 것이었다.


그래서 두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도 낮잠을 참고 참으며 그림을 그리고

밤잠, 새벽잠을 줄이고 줄여가며 글을 썼다.

그래서 그랬는지 병이 났고 나는 잠을 컨트롤할 수 없는 몸이 되어

새벽마다 극심한 통증을 참다가 해가 뜰 무렵에야 진정제를 맞은 것처럼 잠에 빠져들어

아이들이 일어나는 밝은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겨우 눈을 떴다.


그런데 이제 남편이 아침에 아이들을 챙겨서 학교에 보내니

나는 해가 뜨다 못해 하늘 정가운데에 올랐다가 지는 쪽으로 넘어가는 와중에 눈을 뜬 것이다.


처음엔 죄책감, 부끄러움, 무력감이 올라오려고 했다.

미라클 모닝을 몇 년째 하면서 새벽 3시 33분에 일어나는 지인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런데 그건 나에게 맞지 않는, 사회가 나에게 오랜 시간 주입한 목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타이밍에 나의 상황에 맞는 생각은 '축하'였다.

드디어, 그 '늦잠'을 제대로 잘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에 대한 축하.

달콤한 잠의 맛을 알게 된 것에 대한 축하.

오후 2시에 일어나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사과와 참외를 먹으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에 대한 축하.

미래에 내 자식이 밤새 놀다가 잠이 들어 오후 2시가 되어서야 눈을 비비고 일어나도

너 뭐가 되려고 이렇게 게으르냐는 말을 하지 않을 엄마가 된 것에 대한 축하.

새벽 4시에도 일어날 수 있고 오후 2시에도 일어날 수 있는 유연한 사람이 된 것에 대한 축하.

그래, 오늘은 축하가 마땅한 날이다.


내 생각의 틀 밖에 무수히 많은 것들이 있다는 것이 참 재미있다.

오늘은 잠의 틀을 깼고 내일은 또 뭘 깰 수 있을까?

내가 깰 수 있는 가장 큰 틀은 무엇일까?


오후 2시에 일어난 오늘, 나는 나의 남은 생을 그 어느 때 보다 기대한다.

새롭고 싶다. 완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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