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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남추녀 Mar 24. 2020

악평도 독자의 관심이다?

발로 써도 더 잘 쓰겠다는 평 앞에서

"내가 발로 써도 이것보다는 잘 쓰겠다."


1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나는 저 문장을 똑똑히 기억한다. 연재 중이던 장편소설에 달린 건 아니고 그 전에 출간한 한 앤솔로지, 그 중에서도 유독 내 작품만 콕 집어 누군가가 저 댓글을 달아놓았다.


발로 써도 더 잘 쓰겠다고.


그럼 네가 발로 써보던가! 그 댓글 밑에 이런 답글을 달고 싶었지만 소심한 나는 그냥 조용히 인터넷 창을 닫고 침대로 들어가 이불을 덮고는 "하아."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거의 매일 내 이름으로 검색을 했다. 달랑 작품 몇 편 내놓은 게 전부이고 인기 없는 연재작 하나를 쓰고 있을 뿐이었는데도 독자들이 내 작품을 어떻게 보는지 그게 너무 궁금했다.


그런데 이쯤에서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내 작품을 어떻게 보는지보다는 독자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내가 쓴 작품이 곧 '나'라는 큰 착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서평이나 댓글 하나에도 일희일비했다. 가뭄에 콩나듯 올라오는 서평들 속에서 내 이름으로 된 단편의 평을 찾기 위해 서둘러 스크롤을 내렸다. 재미있었다고 하면 마치 내가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칭찬이라도 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았고 별로였다고 하면 나라는 인간 자체가 별로가 된 것만 같아 종일 시무룩했다.


평이 좋으면 기분이 들떠서, 평이 안 좋으면 기분이 가라앉아서 글쓰기가 힘들었다. 작가는 자신과 작품을 분리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시절의 나는 그게 서툴렀다. 그러다 보니 몇 개 되지도 않는 연재 소설 밑에 달리는 댓글에도 무척 신경을 썼다. 맻 개나 달릴까, 많이 달렸으면 좋겠다는 마음 한편으로는 악평이 달릴 거면 차라리 무플이 낫지 않을까 싶은 나약한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이 문제를 가지고 오래 고민을 했다. 

작가란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주체할 수 없어 남들에게 떠벌리고 마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만큼 타인이 내 이야기를 어떻게 들어주는지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것을 원동력 삼아 다른 이야기를 또 쓰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하자면 작가는 곧 '관심 종자'다. 독자의 관심을 통해 동기를 부여받고 용기를 얻으며 기꺼이 중노동을 감내해내니까.


그런 점에서는 나라고 다를 게 없었다. 주목받고 싶고, 관심받고 싶었다. 어쩌면 내가 장르 소설을 쓰는 궁극의 이유가 그것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지만 내 작품에 달린 서평을 하나하나 다 확인하고, 그 밑의 댓글까지 또 확인하고, 매일 강박적으로 내 이름이나 작품 제목으로 검색을 하는 일은 감정 소모가 너무 컸다. 나처럼 마음이 무른 사람은 그런 행위가 글쓰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문제의 댓글을 본 날 이후 나는 거의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컴퓨터 앞에 앉으면 계속 그 댓글이 생각났다. 


발로 써도 이것보다 잘 쓰겠다......

발로 써도......

발로......


심지어 한 번은 진짜 발로 타이핑을 해본 적도 있는데 결과야 뭐, 다들 예상하다시피 제대로 된 글을 쓸 수가 없었다. 난 약간 위로를 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짐을 내려놓은 건 아니었고, 나는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내 소설가 생활 역시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하여 결단을 내렸으니 나는 내 이름과 작품 제목으로 절대 검색하지 않겠노라 마음먹었다. 서평도 읽지 않고 댓글도 읽지 않고 아무튼 나를 비롯한 내 작품에 대해서는 눈과 귀와 코(이건 아니구나)까지 닫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음먹고 나니 조금은 편해졌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그 다짐을 아주 잘 지켜오고 있다.




작가라면 누구나 글, 혹은 작법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 원래 작가라는 사람들이 그런 거 정하기를 좋아하니까.

나 역시 마찬가지인데, 나는 늘 단 한 가지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잊지 않으려 한다.


"소설을 쓸 때는 나만 믿고, 소설을 다 쓰고 나면 나를 제일 믿어선 안 된다."


뭔가 그럴싸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이건 나처럼 소심하고 유약한 소설가를 위한 아주 작은 노하우일 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소설을 쓸 때 작가 자신을 믿지 못하면 완성은 물론이고 일관된 이야기를 만들기 어렵다는 뜻이다. 반대로 완성해서 편집자의 손에 넘어가게 되면 그때부터는 어떤 비판과 수정이라도 수용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내가 직접 쓴 작품이기에 나무가 아닌 숲을 본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고 객관적으로 보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이다.


나는 지금껏 편집자의 수정 요구에 토를 달아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소심한 성격 탓도 조금은 있지만 앞서 말한 저 철학을 지키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내 작품을 제일 잘 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버려야만 비로소 '직업인으로서'의 소설가가 될 수 있다.


'자신에 대한 검색'을 끊은 후(아! 이건 정말 중독이라 부를만 하다) 나는 조금 더 편하게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이후 여러 종의 새로운 작품을 발표했지만 나는 아직도 그 작품들에 어떤 서평이 달렸는지 알지 못한다. 가끔 편집자가 반응이 좋다, 나쁘다를 알려줄 때 빼고는 이미 독자의 품 안으로 떠난 내 결과물에 대해서는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그런 식으로 슬럼프를 이겨내며 아슬아슬 연재를 이어오던 나는 마지막 한 회를 남겨놓게 되었다. 즉, 이야기의 결말을 써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그때 또 나는 새삼 당황했다.

멍청하게도, 연재 내내 결말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나는 고민이 있거나 글이 막히면 늘 그랬던 것처럼 목욕탕으로 달려가 따뜻한 탕에 앉았다. 그러고는 궁리를 거듭했다. 머리가 너무 아플 정도로 고민했다. 목욕탕 안에 너무 오래 들어가 있어 발가락이 퉁퉁 불 정도였다. 어찌 되었건 그럴싸한 결말을 생각해 내긴 했는데 나는 이 과정을 통해서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건 바로 장편소설을 조금 더 쉽게 완성하는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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