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점을 정해두면 반드시 도착하게 되어 있다
플롯 자체를 질색하는(나도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스티븐 킹이 듣는다면 펄쩍 뛸 일이겠지만 나는 어떤 분량의 소설이건 시작 전에 결말을 정해두고 쓴다.
당연한 일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터. 하지만 내 주위는 물론이고 내 주위의 주위를 뒤져봐도 나처럼 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나는 그야말로 절대 변하지 않는 결말을 미리 구상한다.
그 구상은 마지막 문장을 결정하면서 끝을 맺는다. 그렇다면 마지막 문장 안에는 어떤 정보들이 담기는 걸까? 결말의 분위기, 이야기가 끝나는 장소, 주인공의 상태, 사건의 해결 유무 등 그야말로 핵심 정보가 가득 들어가 있는 게 바로 마지막 문장이다.
결말을 정하고 마지막 문장을 써둔다는 것은 내가 쓰게 될 소설이 도달해야 할 도착점을 정해두는 것과 같다. 도착점이 있다는 건 왜 좋을까?
절대 길을 잃지 않아서?
천만에. 세상에는 목적지와 도착점이 있지만, 심지어 '네이버 지도'라는 신기술을 사용하지만 종종 길을 잃어버리는 나 같은 지독한 길치도 있는 법.
장편을 쓰다보면 도착점을 정했다 한들 길을 잃기 일쑤다. 그만큼 긴 여정이고 복잡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희망적인 것은 길을 잃고 헤매는 그 과정 자체가 소설 속에서 여러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이다.
즉, 소설이란 도착점을 향해 움직이는 캐릭터의 여정을 보여주는 하나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야기가 산으로 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산으로 가더라도, 홍대입구역 3번 출구라는 도착점만 정해두면 반드시 거기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산으로 가고, 바다를 건너고, 길을 헤매는 그 과정에서 갈등과 재미와 감동이 생겨난다.
왜 아니겠는가? 지하철만 타면 되는데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한참을 헤매다가 홍대입구역 3번 출구에 도착했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나만 해도 무릎을 치며 감탄하는 것은 물론이요, 한 줄기 감동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첫 장편 소설이자 연재작인 <밤의 이야기꾼들>을 쓸 때만 해도 그런 노하우가 없었기에 결말을 정하는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 뒤로 갈수록 불안했으며 앞에 던져놓은 떡밥과 설정을 회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과정을 거쳤기에 다음 장편소설을 쓸 때는 꼭 결말을 정해두자고 마음 먹었다. 물론, 다음 작품까지 아주 긴 공백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그 방법을 사용해 <소용돌이>를 써낸 건 맞다.
어떤 작가는 소설을 쓰다 보면 캐릭터가 자연스레 결말을 향해 나아가고 그렇기에 결말은 미리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 그런 작가는 천재 아니면 사기꾼이다.
세상의 모든 소설, 특히 장르 소설은 인생의 뒤늦은 카피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참신한 이야기 같아도 현재의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 그러니까 '현실'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현실이 항상 더 가혹하고 미스터리하며 공포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일로 가득차 있다. 장르 소설은 앞서 간 현실의 꽁무니를 겨우 쫓을 뿐이다.
그럼에도 장르 소설이 가치를 가지는 이유는 현실과는 다른 결말을 충분히 도출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전적으로 작가의 몫이자 특권이다.
이 특권을 버리거나 함부로 사용하는 건 소설가의 기쁨 하나를(그것도 제일 큰) 놓치는 것과 마찬가지 일이다.
<밤의 이야기꾼들>은 우여곡절 끝에 연재를 마쳤다. 뒤늦게 수습한 결말치고는 그래도 나름 최선의 선택을 했고 개별 이야기 역시 나는 마음에 들었다.
문제는 이게 다른 사람 눈에도 괜찮아 보이는가 하는 것이었다. 특히 출판 편집자들.
연재를 했지만 그게 곧 종이책으로의 출간을 보장해주는 건 아니었다. 나는 무명이나 다름없었고, 첫 장편이었으며 게다가 호러물이었고, 심지어 옴니버스 구성이었다.
종이책으로 내기에 안 좋은 조건은 다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나는 선배 작가의 적극적인 소개와 추천을 받아 <밤의 이야기꾼들>을 한 출판사에 투고했다.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상당히 초조했다. 기약 없는 답을 기다리는 것만큼 초조한 일이 또 있으랴.
가끔은 악몽을 꾸기도 했다.
편집자들끼리 모여 내 작품을 두고 이따위 이야기로 감히 출간할 생각을 한 거냐고 뒷담화를 하는 꿈이었다.(꿈은 꿈이겠지?)
그러던 어느 날, 출판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출간을 하자는 연락이었다.
나는 그 메일을 읽는 순간 기뻐서 펄쩍펄쩍 뛰거나 만세를 외치거나 출판사가 있는 방향을 향해 절을 하는 대신에 머리를 감싸쥐고 고개를 숙였다. 너무 기쁘면 오히려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때의 내가 그랬다.
그리하여, 2014년 여름에 내 첫 장편소설인 <밤의 이야기꾼들>이 온라인과 오프라인 서점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소설가로서의 본격적인 삶이 시작되었다.
좋았냐고?
물론.
하지만 타임머신이 있다면 <밤의 이야기꾼들> 출간을 앞둔 그 시절의 나를 찾아가 분명 이 정도의 경고는 했을 것이다.
"이제 시작이야. 고생은, 이제, 시작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