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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남추녀 Mar 23. 2020

붙이고, 잇고, 덧대어 쓴 이야기

패치워크의 매력에 빠지다

장편소설 연재.


준비까지는 고작 한달의 시간밖에 없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에서 나는 폴더를 뒤지기만 했다. 늑대인간, 구미호, 사라진 팔 하나, 홍수, 물귀신, 장산범, 실종, 환생, 부적, 전염병, 도플갱어, 빨간마스크, 눈보라......

단순한 아이디어에서부터 이미 완성한 단편에 이르기까지 나는 지금껏 쓴 이야기를 다시 읽으며(새삼 감탄과 좌절을 반복하며) 장편에 대한 영감을 얻으려 했다.


여담이지만 나는 일단 완성한 작품은 다시 읽어보지 않는데 그건 바로 감탄과 좌절의 과정이 싫기 때문이다. 처음 다시 읽을 때는 "와! 역시!" 하다가 마지막 문장에 다다라서는 "이게 최선이었어?"라고 꼭 묻게 된다. 

이게 최선이었냐는 질문은 내가 아는 질문 중 최악인데, 하물며 그걸 자기자신에게 한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아무튼, 기존에 썼던 이야기를 단순히 확장하려던 나는 그게 멍청한 짓이라는 걸 빨리 깨달았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주제 파악에 능했다.


소설을 써본 기간도 짧고, 제대로 배운 적도 없으며, 더군다나 처음으로 장편을 쓰는 무명 작가라면 자신이 제일 잘 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아무렴 그렇고 말고. 

이미 완성한 단편소설을 장편으로 바꾸는 일은 기술적인 노련함이 있어야 가능하다. 애초에 단편 규모로 설정한 이야기를 장편에 맞게 늘이려면 사건이 더 발생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 캐릭터 추가, 주제의 변경까지 필요하다. 대공사인 것이다.


나는 대공사를 책임질 깜냥이 안 됐다. 그리하여 앞서 말한 꼼수를 생각해 냈는데 그게 바로 '패치워크 기법'이었다.


패치워크(patchwork)란 여러 다른 천을 모아서 하나의 천으로 만드는 수예 기법인데 아주 섬세한 작업을 요하기는 하지만 부수고, 구부리고, 용접을 해야 하는 대공사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저 햇빛이 잘 드는 안락의자에 앉아 꼼꼼하게 바느질만 하면 되니까.


그 옛날 국민학교 시절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좀 더 자라 캠핑에서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그랬던 것처럼 나는 '무섭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주는 방향으로 장편을 쓰자고 계획했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야기 하는 것, 그 중에서도 무서운 이야기 하는 것 말이다.


아! 내게 이야기를 듣고 잠을 설친 영혼이 수백이고, 혼자서는 화장실에 못가 끙끙거리던 영혼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무섭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큰 틀, 즉 밑바탕에다가 나는 기존에 완성했거나 아니면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던 다양한 소재의 서로 다른 이야기를 이어붙이기 시작했다. 

물귀신, 물건을 훔치는 난쟁이, 도플갱어, 저주에 걸린 소녀, 집에 집착하는 남자 등의 이야기를 가지고 나는 붙이고, 잇고, 덧대는 작업을 했다. 


작업을 하는 동안 바늘에 찔리는 것 정도의 어려움이 있긴 했지만 아무렴, 대공사보다는 훨씬 나았다. 나중에 또 이야기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난 그런 대공사용 공구를 몇 년 전에야 얻었다. 소설가로 한 뼘 정도 더 성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나는 한달 만에 장편의 틀을 잡았고 무사히 연재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작품의 제목은 <밤의 이야기꾼들>이었다.


 




대부분의 장르 소설가는 독자에서부터 시작한다. 

마르고 닳도록 읽다가 더는 읽을 책이 없어서 '그렇다면 내가 한 번 써볼까' 하는 심정으로 작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장르 소설을 지향하는 작가 혹은 지망생은 이른바 '이야기부심'이 있다. 어떤 소재 하나만 이야기해도 그건 어떤 작가가 어떤 작품에서 어떻게 활용했으며(나는 읽었으며), 또 다른 작가는 이렇게 활용했다는 식으로 관련 지식을 줄줄 쏟아낸다. 그렇게 지식을 뽐내는 정도에서 그치면 참 좋은데 몇몇은 '그렇기 때문에' 나는 쓸 수 없다는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기도 한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람.


기존의 유명 작가가 이미 사용한 소재이기에, 혹은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가 쓴 소재이기에 나는 쓸 수 없다는 건 아무리 표절의 문제를 감안한다 해도 너무 극단적인 결론이다.


소재는 아무리 똑같아도 상관이 없다. 그걸 누군가가 독점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누군가가 도플갱어에 대해 이미 썼다고 해서 기죽을 필요 역시 없다. 소재는 그야말로 재료일 뿐이다. 설탕이 백종원의 전유물이 아니듯 우리 주위에 무궁무진하게 널려 있는 각종 이야깃거리 역시 아무나 사용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이 '아이디어'라면 문제가 조금 달라진다. 물귀신은 그냥 소재인데 '물이 없는 공간에서도 활동할 수 있는 물귀신'은 아이디어가 된다. 이건 그 작가만의 고유한 아이디어로 보장받아야 한다. 이걸 가져다 쓰는 건 표절이다.


그 외에는 다 괜찮다. 


스티븐 킹 소설에 등장하는 흡혈귀, 외계인, 미친 아빠, 유령 등도 흔하디흔한 소재일 뿐이다. 스티븐 킹은 그 소재들을 끝내주는 이야기로 만들어 자신의 지장을 찍었을 뿐이다.


세상에 새로운 이야기란 없다.


그건 아리스토텔레스 시절에도 그랬다. 철학자 테렌티우스는 아예 "전에 말해지지 않은 말은 아무것도 없다"는 명언을 남겼는데 무려 기원전 3세기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 옛날에도 우리는 똑같은 말을 하고 살았던 것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란 없다고.

오죽하면 전래동화라 칭하는 각 나라의 동화들 역시 다들 비슷비슷한 이야기겠는가. 

나는 억울하게 죽어 귀신이 된 여자가 나오는 이야기를 백 개쯤은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죽은 사연이 다 다르다면야 도대체 무슨 상관이겠는가.


내가 가진 소재와 아이디어를 검증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그걸 쓰지 않을 핑계로 삼을 필요는 없다. 누군가가 먼저 사용한 소재라 해도, 누가 쓰는가에 따라 얼마든지 독창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혹은 그 소재를 어떤 관점으로 들여다보는 가에 따라서도 수많은 다른 이야기를 뽑아낼 수 있다.


<밤의 이야기꾼들>은 참신한 작품이 아니었다. 나는 애초에 어딘가에서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의 '이면'을 밝혀낸다는 설정을 가지고 연재를 시작했다. 꼼수였지만, 그게 통했다. 폭발적인 독자 반응을 얻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나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새로운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자 내 목표,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가에 대한 해답도 찾게 되었다.


재미있는 소설.


그게 바로 내가 바라는 소설이었다. 

저 작가의 작품은 적어도 재미 면에서는 아주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것, 그게 내 목표가 되었다. 


언뜻 아주 희망에 찬 시기였던 것도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안 좋은 쪽에 가까운 일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작품에 악평이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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