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으로 달리던 밴이 내 앞에서 멈춰 섰다.
“유채린 맞지? 어서 타?”
“네?”
“빨리 타라고!”
벤 보조석 문이 열리더니 아이돌 같이 생긴 남자가 말했다. 동시에 기자들이 좀비 떼처럼 달려왔다.
좀비에게 물리느냐. 생전 처음 보는 남자의 차를 타느냐. 바이러스냐. 납치냐.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
“하하- 잘했어. 깜짝 놀랐지?”
남자가 운전을 하며 말했다. 나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어안이 벙벙했다.
“....근데 누구세요?”
“아- 나 미소 엔터테인먼트 매니저야. 시온 형이 무슨 일이 있어도 너 픽업해야 한다고 해서. 보나 마나 기자들이 쫙 깔려있을 거라고. 근데 꼭 이런 일은 나한테 시킨다니까. 안 그래도 애들 관리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남자는 운전을 하면서 툴툴거렸다.
그러니까 이니셜 매거진 편집장 시온이 날 픽업하라고 했다는 이야기. 여기까지 이해했다.
“어쨌든 그래도 영광이야. 프란다 패션쇼의 메인 모델로 뽑힌 유채린은 과연 누구인가? 패션계는 물론 지금 인터넷에서도 난리거든. 난 지금 그 주인공을 직접 모셔가고 있는 중이고. 하하-”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그리고 엘 카란다가 왜 저를 뽑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하겠고...”
어제까지만 해도 기분이 날아갈 거 같았다. 그런데 막상 닥치고 보니 무서웠다. 엘 카란다의 패션쇼 메인 모델이 이 정도로 파급력이 크다는 걸 새삼 실감하는 중이었다.
“하긴 그 디자이너님이 원체 냉정해서 지금까지 메인 모델은 항상 오디션으로 뽑았거든. 그때마다 모델들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고. 그래서 길거리 캐스팅이 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좀 놀랐어. 그런데 지금 보니까 조금 짐작이 가네.”
“짐작이요..?”
“그래, 매력 있어. 수수하고.”
남자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남자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이윽고 남자가 커다란 빌딩 앞에서 차를 멈춰 세웠다.
“자, 다 왔어. 여기가 프란다 본사야. 10층으로 올라가면 돼. 어서 들어 가봐.”
“네? 같이 가는 거 아니에요?”
“말했잖아. 시온 형 부탁받고 온 거라고. 나는 애들 스케줄 하러 가야 해서.”
“아...”
“그럼 다음에 또 보자. 안녕.”
“네, 고맙습니다.”
나는 밴이 사라진 후에서야 남자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
매니저라고 했지만 아이돌이라고 할 만큼 미모도 출중했고, 사근사근 웃으며 말하는 게 호감형이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 사무실로 향했다.
철컥.
긴장한 채로 문을 열자 책상 의자에 앉아있는 엘 카란다와 그 앞에 있는 시온이 보였다.
“여, 왔구나. 신데렐라. 오는데 불편한 건 없었지?”
“네 매니저라는 분이 도와주셨어요.”
“역시 그 녀석 픽업 하나는 끝장나게 잘해준다니깐.”
“근데... 무슨 일로... 저 원래는 학교에 가야 하는데..”
“아 그거? 당분간은 학교에 가기 힘들 걸? 기자들이 집까지 들이닥친 거 보면 학교야 뻔하지. 프란다 패션쇼 메인 모델은 그 정도로 막중하다고?”
“저.. 근데 아직 모델을 하겠다는 말도 안 했는데...”
“그럼 싫다는 거니?”
쭉 나를 지켜보고 있던 엘 카란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차갑고 세 보이는 그녀의 인상은 어느 누구라도 위축이 될 것만 같았다.
“네... 모델이라는 거 어렸을 적에 동경은 했지만... 그게 실제로 가능할지는... 더군다나 그냥 모델도 아니고 프란다의 메인 모델을...”
“얘, 똑바로 말할래? 그래서 하겠다는 거니, 말겠다는 거니? 어차피 너 말고도 이 바닥에 메인 모델할 사람은 널리고 널렸어.”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처럼 날아와 가슴에 꽂혔다.
차갑고도 냉정한 저 음성은 그녀가 왜 패션계에서 얼음여왕이라고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훗. 모델을 동경했다면 지금이야 말로 절호의 기회인데 걷어차시겠다?”
시온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너 말야. 자신 없으면 안 해도 좋아. 카란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강요는 안 해. 다만 이거 하나만 알아둬.”
시온이 검지로 아래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건물에는 수많은 모델 연습생들이 있어. 지하부터 시작해서 한층, 한층 위로 올라가는 게 그들의 꿈이야. 한 층씩 올라갈 때마다 프로가 되어가는 거거든. 근데 너는 단번에 10층. 여기까지 올라온 거라고. 이런 전례는 있었던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아마 없을 거야. 그야말로 기적이지.”
시온이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잘 알아둬. 우리 같은 초특급 프로들이 프란다의 메인 모델을 그냥 뽑는 줄 알아? 그것도 황당하게 길거리 캐스팅으로? 이거 사람들에게 욕 얻어먹기 딱 좋은 거 아냐? 우리가 그렇게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라고. 너는 그 이유를 사람들에게 증명하면 돼.”
“…….”
나는 시온의 말을 들으며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는 게 더 확고해졌다. 그의 눈빛과 태도는 정말로 당당했고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볼 정도로 프로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 신데렐라. 이제 어떻게 할래? 모든 결정은 네가 하는 거야. 무대 위에 설래 말래?”
나는 고민의 빠졌다. 시온이 왜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 그들에게도 도전이고 나에게도 도전과 같은 일이었다.
“알았어요. 도전해 볼게요.”
나는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건 모델을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도 아무나 뽑은 건 아니라고. 그쵸? 카란다?”
“…….”
카란다의 저 시선. 보고만 있어서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이윽고 그녀가 적막을 깨고 입을 열었다.
“워킹 좀 해볼래?”
“워킹이요?”
“그래, 모델로 설 거면 워킹은 당연한 거잖아?”
어떠한 예고도 없는 제안.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왜 자신 없니?”
“아니요. 한 번 해볼게요.”
나는 말을 마치자마자 주머니에 손을 넣고 카란다를 향해 당당히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 앞에서 멈춰 서서 자세를 취한 다음, 턴을 해 다시 몸을 돌려 포즈를 취했다.
“...어떤가요?”
“…….”
“…….”
카란다와 시온 모두 말을 잇지 않았다.
‘역시 이상한 건가?’
“카란다. 우리 눈이 틀리지 않았는데요?”
“그래, 흉내 낼 줄 아네.”
지적이 나올 줄 알았던 것과는 다르게 흡족한 얼굴을 하는 둘이었다.
“좋아. 테스트는 끝났으니까, 이제 선배 모델들한테 인사 하로 가자. 따라와.”
‘이렇게 빨리?’
아직 마음의 준비도 안 됐는데 속전속결로 내 손을 잡고 사무실을 나가는 시온이었다.
***
시온은 나를 프란다 건물 7층으로 데리고 갔다. 나는 프로 모델들과 함께 한다는 것에 기쁨보다는 걱정이 먼저 앞섰다. 아무래도 그녀들 입장에서 나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니까.
연습실 문을 열자 음악과 함께 워킹 연습을 하고 있는 ‘진짜 모델’들이 보였다. 그들은 연습을 하고 있다, 시온을 보고는 쪼르르 달려왔다.
“편집장님”
“그래, 모두 연습 잘하고 있어?”
“물론이죠! 이번 이니셜 잡지 프란다와 컬래버로 발간한다면서요?”
“그래, 그래서 특별히 더 신경 쓰고 있는 중이야.”
“그럼 당연히 저희 써 주시는 거죠? 프란다 모델인데.”
“하하, 그거야 너희들 하기에 달렸지.”
“에이~ 편집장님도 참~ 저희 부를 거 다 알아요~”
콧소리를 내며 애교를 부리는 모델들이었다.
“근데 이 아이는 누구예요?”
모델들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아, 너희들 소식 들었지? 프란다의 새로운 메인 모델 발탁됐다는 거.”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냉랭해졌다.
“그럼 이 아이가 그 길거리 캐스팅이 됐다는?”
“맞아. 너희들이 선배니까 잘 이끌어 달라고.”
“잘 부탁합니다. 유채린입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했지만 하나같이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럼 같이 연습들 하고 있어. 신데렐라는 이따 보자고.”
그 말과 함께 나를 덩그러니 두고 연습실을 나가는 시온이었다. 그가 나가자 모델들의 표정이 더욱 차가워졌다. 제일 고참으로 보이는 모델이 나를 한번 쑥 훑어보고서는 입을 뗐다.
“너 몇 살이니?”
“21살이요.”
“21살? 새파랗게 어리네. 너 듣기로는 모델일 한 번도 한적 없다고 하던데. 맞니?”
“네.”
그러자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이런 애가 뽑혔냐는 이야기였다.
“참나. 어이가 없네. 어딜 봐서 얘가 메인 모델에 어울린다는 거야?”
“언니, 그 할망구 노망난 거 아녜요?”
“듣기로는 저 애 오래전에 죽은 손녀와 닮았다는 이야기도 있던데요?”
‘죽은 손녀?’
“하이고- 그 할망구가 이젠 하다 하다 할 게 없어서 감성팔이까지 하시려나 보네. 이번 패션쇼에는 추모행사라도 하려나?”
깔깔깔 거리며 웃는 그녀들이었다. 나는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 입을 뗐다.
“저기요.”
“응?”
“카란다가 날 뽑은 게 죽은 손녀와 닮아서 인지는 저도 몰라요. 하지만 고인을 가지고 웃음거리로 삼는 건 너무 한 거 아닌가요? 그리고 당신들은 프란다의 모델들이잖아요? 뒤에서 이러는 거 비겁하단 생각 안 들어요?”
순식간에 싸늘해지는 연습실이었다. 설마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분위기였다.
“길거리 캐스팅을 했다고 하더니만, 아주 자기와 똑같은 애를 데리고 왔네.”
“맞아요 언니, 굴러들어 온 돌 주제에 어디서 우리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야, 너. 유채린이라고 했지? 카란다가 널 뭘 보고 뽑아 든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두고 봐. 네 발로 여기서 나가게 해 줄 테니까.”
나는 그녀들을 노려보다 도저히 분을 참을 수 없어서 연습실을 박차고 나왔다. 뒤에서 그녀들의 웃음소리가 따갑게 들려왔다.
***
“아우 화나!”
나는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버럭 소리쳤다.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리더니 어플이 말했다.
[그래도 그렇지 똥 싸면서 저와 대화 거는 건 실례 아닌가요?]
“야! 내가 무슨 똥을 싼다고! 그냥 변기에 앉아 있는 것뿐이거든?”
[아아아. 그런가요? 그럼 사과드리죠. 제가 오해했네요.]
“참나.”
나는 어이가 없다며 어플을 쳐다봤다. 정말 이 녀석은 어떻게 생겨 먹은 건지 연구대상 그 자체였다.
진동이 울리며 다시 어플이 말했다.
[그래도 대단하던데요? 모델들이 그렇게 많은데 기하나 죽지 않고. 성깔+10의 위엄을 확실히 보여줬어요.]
“안 그래도 짜증 나는데 너까지 까불래?”
싸지도 않은 똥을 싼다느니 성깔의 위엄이라느니, 이 녀석의 특기는 불난 집에 부채질인 모양이다.
“아으! 아직도 화가 안 풀려. 그냥 그만둘까?”
굳이 겪지 않아도 앞으로의 일이 눈에 선했다. 온갖 시기와 질투 권모술수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토닥토닥]
“...뭐하는 거야?”
[힘내시라고 등 두드려 주는 겁니다.]
또 이럴 때는 아부까지.
“어떻게 하지? 이런 상황이라면 앞으로 일어날 일도 불 보듯 뻔한데. 계속해야 하는 거 맞아?”
[사내대장부가 칼을 뺐으면 무라도 썰어야죠.]
“난 여자거든? 그리고 어떻게 이겨. 다구리에는 장사도 없다는데.”
[사내대장부는 아니더라도 말하는 건 거의 사내아이 수준이네요.]
[제가 볼 땐 그냥 그 스타일로 쭉 밀고 나가면 문제없을 거 같아요.]
[정 안되면 레벨업을 통해 능력치를 더 올리시던지.]
“능력치?”
나는 아치 싶다며 말했다.
“어떤 걸 올리면 되는데?”
[성깔이요.]
“장난할 기분 아니라니깐!”
소리를 꽥 지르자 크게 울리는 화장실이었다.
[저도 장난하는 거 아니에요.]
[성깔 능력치 20까지 올리면 센 언니 스킬이 생기는데. 그걸로 맞서 싸우라는 얘기였어요.]
“센 언니 스킬?”
나는 순간 구미가 당겨 스킬 설명을 읽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