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얼음여왕

by 송아론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나는 깜짝 놀랐다. 집이라고 생각했다가 전혀 다른 공간에 와있는 걸 보고, 순간 여기가 어딘지 헷갈렸다.


‘맞아. 시온의 집이었지. 어제 와인을 먹고 그대로 뻗었고...’


불현듯 나는 어젯밤 일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술에 취해 시온에게 한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안아달라느니, 침대로 가자느니 가관이었죠.]


어플이 말했다.


“뭐야, 나 기억이 안 나. 어제 실수한 거라도 있어?”


[글쎄... 실수라고 하기에는 겨우 와인 몇 모금 마시지 않았어요?]


“나 술 약하단 말야!”


버럭 소리치다, 나는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시온이 들었을까 걱정이 되서였다.


방문을 열고 나오자, 먼저 일어났는지 거실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시온이었다.


“잠버릇이 독특하네? 누구랑 이야기하는 거야?”


“아. 아녜요. 제가 원래 꿈을 잘 꿔서... 하하...”


나는 어색한 미소로 둘러댔다.


시온이 커피잔을 입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커피 한잔 할래?”


“네...”


나는 부끄러운 얼굴로 소파에 앉으며 대답했다.


“자. 여기.”


시온이 커피를 건 낼 때,


“저, 혹시 어제 실수 하진 않았죠?”


“겨우 와인 몇 모금으로?”


어플이랑 똑같은 말을 하는 시온이었다.


“그냥 침대로 안아 달라고 해서 안아줬을 뿐이야.”


“죄, 죄송해요. 제가 술을 잘 못마시거든요...”


“괜찮아. 나름 재미있는 경험이었어.”


시혼은 미소 지으며 커피를 마셨다.


“자는데 불편한 건 없었지?”


“네.”


“오늘은 프란다 패션쇼 홍보 촬영할 거야. 나가게 준비하자.”


‘촬영?’


나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셀카를 찍는 것도 싫어하는 나에게 갑자기 촬영이라니.


“저, 시온. 저 사진 찍은 거 한 번도 안 해봤는데 바로 촬영해도 괜찮은 거예요?”


시온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 지난번에 카란다와 내 앞에서 했던 것만큼만 하면 돼.”


말이야 쉽지. 나는 정말로 잘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믿음이 가지 않았다.


***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오자 홍보 촬영을 하기 위해 스텝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선배 모델들은 이미 와 있는 상태였다. 그들이 시온과 나를 보더니 이쪽으로 걸어왔다.


“오셨어요? 편집장님.”


“그래, 모두 고생 좀 해줘.”


“고생은요. 이런 기회가 주어지는 것만으로도 영광인데요.”


“맞아요. 대신 이니셜 매거진 40주년에 저희 꼭 불러 주셔야 해요? 아셨죠?”


“알았어. 긍정적으로 생각할게.”


“편집장님 짱!”


역시나 시온 앞에서는 온갖 아양과 애교를 부리는 그녀들이었다.


‘시온은 정말 주혜진에게 일어난 일을 모르는 걸까?’


“그럼 채린이 좀 챙겨줘. 잠시 볼일 좀 보고 올 테니.”


“네, 걱정 마세요.”


시온이 잘하라며 나에게 윙크를 한 후 스튜디오를 빠져나갔다. 그러자 급격히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너 편집장님한테 왜 계속 붙어 있는 거야?”


“맞아.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너 편집장님한테만 붙어 있더라? 혹시 꼬리 치는 거니?”


“꼬리 친다뇨?”


나는 맞받아 쳤다.


“그게 아니고서야 왜 하루 종일 편집장님이랑 같이 있냐고.”


“당신들이 제게 헛짓할까 봐 그런가 보죠.”


그러자 목소리를 높이는 모델들이었다.


“뭐? 당신들? 야! 우리가 선배인 거 몰라?”


“선배가 선배 같아야 선배 대접하죠.”


“진짜 얘 봐라. 지가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네!”


“적어도 당신들이 똥이라는 것쯤은 알아요.”


“뭐?? 야!!!”


모델들이 나를 둘러싸고 소리칠 때였다.


“지금 여기서 뭣들 하는 거야?”


엘 카란다였다. 싸늘한 얼굴로 우리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디, 디자이너님.”


모델들이 엘 카란다를 보자마자 꾸벅 고개를 숙였다. 카란다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가장 중요한 촬영인데 다들 여유롭나 봐. 준비는 다 하고 떠드는 거지?”


“그, 그게 아니라.”


“잠깐. 나 지금 너희들 이야기 따위 들으려 하는 거 아니거든? 빨리 준비하고 촬영해.”


“네, 알겠습니다.”


“네!”


카란다에게 대답을 하고는 일사불란하게 흩어지는 모델들이었다. 그들은 카단다만 보면 겁먹은 강아지 같은 모습을 했다. 하지만 나도 순간 방심한 걸까?


“넌, 뭐하니? 선배들 따라 안 가고? 가장 먼저 준비하고 있어야 할 사람은 너 아냐?”


엘 카란다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아, 네! 준비할게요!”


나는 대답 후 재빨리 대기실로 뛰어갔다.


대기실로 들어가자 모델들이 피팅을 하고 있었다. 모두 나를 째려봤지만, 모른 척했다. 무시하고 의상을 갈아입기 시작할 때였다.


찍-


상의를 입자마자 등 쪽이 터져버린 옷이었다.


“어머, 이게 웬일이니?”


“호호- 모델이 자기 의상 하나 관리 제대로 못하고, 그래서 촬영이나 제대로 하겠어?”


약속이나 한 듯 깔깔 거리는 그녀들이었다.


‘똑. 똑.’


그 타이밍에 노크를 하는 스텝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채린 씨. 촬영 들어갑니다. 빨리 나오세요.”


‘어떡하지?’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대로 옷을 입고 스튜디오로 나갔다. 그러자 의상이 이상하다는 걸 발견한 카란다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너, 어떻게 된 거야? 옷이 왜 그 모양이야?”


“저.. 그게... 죄송해요.”


“죄송?”


카란다가 날카로운 눈빛을 했다.


“너 지금 죄송하면 다야? 내가 광고 촬영을 위해 그 옷 만드려고 한 달을 소비한 거 알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가 아니라, 왜 찢어졌는지를 말해야지.”


“그게.. 그냥 입기만 했을 뿐인데...”


“입기만? 애, 지금 나랑 장난하니? 내가 만든 옷이 입기만 했는데 찢어졌다는 거야?”


“그게...”


나는 어쩔 줄 몰라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똑바로 말 안 해? 지금 촬영하려고 대기하는 스텝들 안 보여?”


“정말이에요. 그냥 입었는데 갑자기 찢어졌어요.”


나는 두 눈을 감고 크게 말했다. 카란다가 할 말을 잃었다는 듯 나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의상팀!”


엘 카란다가 소리치자 스타일리스트가 재빨리 달려왔다.


“네, 디자이너님.”


“너 오늘 의상 체크 확실하게 했어?”


“네.”


“근데 옷이 왜 이 모양이야?”


“그건 저도 잘... 아까까진 괜찮았는데...”


카란다가 어이없다는 듯 입을 뗐다.


“결국은 누구도 옷이 왜 이 모양 이 꼴이 된 건지 모른단 말이네? 그치?”


엘 카란다의 말에 모델들은 물론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하는 스텝들이었다.


“오늘 촬영 취소야. 이따위로 준비해서 제대로 될 턱이 없지. 프란다 패션쇼 홍보 촬영은 아예 빼.


말을 마친 후 홱- 스튜디오를 빠져나가는 엘 카란다였다.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그때 모델들이 입을 뗐다.


“야, 유채린. 너 뭔데 그렇게 서 있어? 여기 사람들한테 사과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그래. 지금 너 때문에 촬영 취소된 거 몰라?”


“맞아요 언니. 실력이 없으면 눈치라도 있어야지. 왜 저런데.”


‘웅성웅성’


스텝들까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다들 그만하지 그래?”


“편집장님.”


시온이 나타나자 모델들은 얌체처럼 또 그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시온이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만 또 사건이 터졌나 보네. 범인은 없는 거고. 그렇지?”


“…….”


“…….”


시온이 모델들을 쳐다보자 하나같이 눈을 피하는 그녀들이었다. 시온이 스텝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의상팀. 너네 옷 끝까지 잘 지켜보고 있었어?”


“네, 분명 대기실에 놔둘 때까지만 해도 아무 이상 없었는데….”


“그러면, 누가 일부로 이런 일을 꾸미지 않는 이상은 옷이 찢어질 리 없다는 거네?”


“죄송해요 편집장님. 다, 제 잘못이에요...”


스타일리스트가 풀 죽은 얼굴로 말했다. 시온은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어. 이번 일은 그냥 해프닝으로 하지. 하지만 또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 모두 각오해야 할 거야.”


시온이 굳은 얼굴로 말하자, 눈치를 보는 모델과 스텝들이었다.


“의상팀은 옷 가져가서 수선하고, 채린이 나 따라와.”


그렇게 시온은 편집장답게 일련의 사태들을 깔끔히 정리하고 나를 데리고 밖으로 갔다.


***


“어때? 기분 좀 나아졌어?”


시온이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가져다주며 말했다. 나는 괜히 고자질하는 거 같아 망설이다가 그에게 솔직히 말했다.


“저기...아까 옷말이에요..”


“응.”


“선배 모델들이 찢은 거 같아요. 물론 제 생각이지만요.”


“생각이 아니라 사실일 거야.”


시온은 내 말에 동조했다.


“그럼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예요? 주혜진 씨도 선배 모델들한테 당했다면서요.”


내가 빠르게 묻자, 시온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답했다.


“알지. 시기와 질투로 그랬다는 거.”


“그런데 왜 가만히 있는 거예요?”


내가 의아한 얼굴을 하자, 시온이 대답했다.


“가만히 라니. 오히려 물증을 잡으려고 하는 중인데.”


“물증이요?”


“그래. 무턱대로 그냥 자르기라도 해 봐. 저 애들이 가만히 있을 거 같아? 매스컴에 갑질 한다고 난리 칠걸? 그래서 지켜보고 있는 거야.”


역시나 시온은 이성적이게 상황을 판단하고 있었다. 동시에 시온이 내편 이라는 게 너무나 든든했다.


“그런데, 이거 야단 났네.”


시온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요?”


“오늘 패션쇼 워킹 연습하는 날인데, 카란다 기분이 좋지가 않으니까, 뭐 뻔하잖아?”


‘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하필 워킹 연습하는 날에 이런 일이 생기니. 이따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불 보듯 뻔했다.


***


잠시 후....


역시나 나쁜 예감은 벗어나지 않았다. 모델들 모두 카란다의 좋은 먹잇감이 되고 있었다. 워킹도 하기 전에 지적을 당하는 먹는 모델도 있었다.


“얘! 너 지금 그게 워킹이라고 하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선배 모델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다음 차례,


“넌 경력도 있는 애가 지금까지 어디서 뭘 배운 거야!”


“죄송합니다.”


다음 선배 모델도 꾸벅 머리를 숙였다.


카란다의 일침은 계속됐다. 워킹을 하던 모델들 중에 욕을 안 먹은 모델이 없을 정도로 살얼음판이었다.


“다음 나와.”


카란다가 묻자,


“?”


“다음 나오라니깐? 누구야?!”


나는 긴장을 하다 그만 타이밍을 놓친 채 워킹을 했다.


그러자 엘 카란다가 재빨리 음악을 끄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뭐야? 또 너야? 오전에는 촬영장을 말아먹더니 이제는 내 패션쇼까지 말아먹을 작정이니?”


“…….”


나는 기가 죽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 말야. 네가 실력으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거 같아? 실력이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채울 생각을 해야지. 너 따위가 지금 쇼 중에 딴생각을 해?!”


엘 카란다의 목소리가 무대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나는 머리가 하얘져 죄송하다는 말도 못 했다. 정말로 끔찍했고 카란다의 말 하나하나가 심장에 비수처럼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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