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온과 함께 프란다 빌딩으로 향했다. 우리가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엘 카란다에게 광고모델 제의 소식을 전하는 거였다.
이니셜 파티에서 카란다와 조금은 가까워진 기분을 느껴, 나는 내 소식을 들으면 그녀도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녀는 평소보다 더 차가운 얼굴을 했다.
“이야기 들었어. 아웃도어 브랜드 ‘러쉬’에 모델로 계약하기로 했다면서?”
“네.”
나는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정말 그녀는 대면만 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기를 눌러버리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녀가 펜대를 입술에 툭툭 치며 말했다.
“인연인지 악연인지 모르겠다만, 그 브랜드는 내가 예전에 수석 디자이너로 있었던 곳이야.”
“...정말요?”
“그래. 아웃도어 의류 디자인은 처음이라 애착도 갔고.”
나는 왜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안 한 거냐며 옆에 있는 시온에게 눈치를 줬다. 카란다가 말했다.
“그런데 1년 후 위약금까지 물면서 걷어차고 나왔어.”
“네?”
나는 왜 그런 거냐며 카란다를 바라봤다.
“아웃도어는 무엇보다 기능이 우선이야. 디자인은 그다음이고. 그런데 그 회사는 그러지 않았거든. 초창기에는 기능에 주안점을 뒀는데 브랜드 가치가 점점 올라가다 보니까, 원가를 낮춘다고 기능보단 디자인에 더 초점을 맞췄어. 그 결과 어떻게 됐을까?”
나는 이야기해 달라며 가만히 들었다.
“처음에는 불티나게 팔렸지. 아웃도어 브랜드가 디자인도 좋으니까. 하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된지 아니? 기능이 타사 제품과 너무 떨어지면서 값만 비싸니까 엄청난 항의가 폭주했어. 그러다 결국 브랜드 가치도 떨어지면서 매장들도 문을 닫았지. 그런 제품에 대한 자부심도 없는 회사를 제왕 엔터테인먼트가 인수한 거야.”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인기 있었던 러쉬가 갑자기 내리막을 걷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재세한 내막을 몰랐다.
“유채린. 너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
카란다가 눈에 힘을 주며 물었다. 왠지 자칫 또 한소리 들을 것 같은 이 기분.
“...모르겠는데요..”
자신 없는 투로 대답하자 그녀가 말했다.
“하긴 내가 너한테 그런 정신을 기대한 게 무리지.”
벌써 가슴에 비수 하나를 꽂는 그녀였다.
“모델이라면 그 회사에 대해서 알아보는 건 당연한 거라고. 네가 모델로 나서는 순간 네 이미지만 보고 물건을 사는 사람들도 있어. 그럼 너는 자동적으로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지는 거야. 그런데 그 회사가 어떤 회사 인지도 모르고, 어떤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덥석 계약을 하겠다고?”
아차.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광고 모델이라는 게 대중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쯧쯧... 한 마디로. 넌 모델로서 자격이 없다는 거야. 그냥 무조건 돈만 받고 촬영하면 된다고 생각하는가 본데 그런 생각이라면 넌 모델이라는 이 직업에 대해 너무 우습게 봤어.”
카란다의 비수가 연이어 내게 날아와 꽂혔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고,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나는 정말로 그냥 촬영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너 말야. 네가 정말 모델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광고에 있어서는 신중히 생각해.”
“...네 알겠어요. 감사해요. 카란다.”
“그래, 나가봐.”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카란다 사무실을 나섰다. 기죽은 얼굴로 사무실 문을 닫으려 하자, 나를 옹호하는 시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하... 카란다. 채린이는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고요. 저 아이는 현재 모델이 좋은 것뿐이지, 이 직업이 어떤 신념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아무에게도 듣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알려 준거야. 허파에 바람 들어가서 하는 모델이 아닌 이상에야 잘 알아야지. 죽은 내 손녀에게는 이런 거조차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후회하고 계시는 거군요?”
“…….”
시온의 말에 슬픈 얼굴을 하는 카란다였다. 시온이 그녀에게 물었다.
“카란다. 하나만 물어볼게요.”
“뭐?”
“그날 왜 길거리에서 왜 채린이에게 관심을 둔 거예요? 그 아이가 매력이 있다는 건 알지만 프란다 메인 모델이라는 게 그렇게 덜컥 결정할 일은 아니잖아요?”
“글쎄…. 그냥 저 애를 처음 보았을 때, 나도 모르게 무언가에 홀린 듯했어. 뭐랄까 느낌이 너무 좋았어. 내 손녀를 닮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격이 비슷한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울컥한 마음이 들었달까?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왜 그랬는지.”
눈시울이 붉어지는 카란다였다. 나는 문틈으로 그녀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 얼음 여왕이라고 불리는 그녀에게 이런 감정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눈물을 삼킨 뒤 고개를 들고 말했다.
“어쨌든 시온. 저 아이를 잘 부탁해. 알겠지만 나는 결코 좋은 소리는 해주지 못하는 타입이잖아.”
“부탁이요? 하하- 걱정 마세요. 그런 말 안 해도 어차피 전 채린이에게 반했는걸요. 제가 반드시 성공적으로 데뷔시킬 테니까 지켜보시라고요.”
‘뭐, 반해?’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반했다는 그 단어가 모델로서의 의미를 말하는 건지 여자로서의 의미인지 중의적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중요한 건 나를 향한 카란다의 마음을 알았다는 것. 그녀가 무작정 내 행동이 마음이 들지 않아 강하게 말한 게 아니라는 걸. 실은 그녀도 나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걸. 나는 숨겨진 그녀의 따뜻한 마음을 알게 되었다.
***
모델 연습실에 들어왔을 때였다. 워킹 연습을 하던 선배 모델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향했다. 아웃도어 브랜드 ‘러쉬’에서 내게 광고 제안이 왔다는 걸 이미 들은 듯한 시선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들이 내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야, 유채린. 이번에 러쉬에서 모델로 제안 왔다는 게 사실이야?”
“네. 맞아요.”
“어머. 언니, 대체 뭘 보고 저 아일 뽑은 거래요?”
“그러게 말야. 모델료는 얼마 준 대니?”
“20억이요.”
“뭐? 이,이십억? 너한테 그렇게 큰 금액을 제시했다고?”
놀란 토끼 눈을 하는 모델들이었다. 그녀들이 다시 말을 이었다.
“너 계약할 생각이야? 그 회사 제품 하자 때문에 말 많았던 회사인 거 알아?”
“언니, 얘가 그런 걸 알겠어요? 그냥 돈 많이 준다고 하니까 덥석 한다고 물었겠죠.”
그게 사실이다 보니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 돈에 자존심 팔아먹는다는 게 이런 이야기구나. 모델이 프로의식도 없어서야 원.”
“저런 애가 나중엔 나라도 팔아먹더라고요”
“호호호.”
나를 두고는 깔깔거리며 웃는 그녀들이었다. 하지만 모두 맞는 말이라 대항하지 못했다. 결국 연습실을 박차고 나갔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역시나 화장실.
나는 빈칸에 들어가 어플에게 물었다.
“너도 들었지? 정말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걸까?”
[그거야 일이 진행되어봐야 아는 거 아니겠어요? 지금으로서는 옳고 그런지 알 수 없죠.]
“그렇겠지...? 해봐야 알겠지?”
[물론입니다.]
“그나저나, 카란다 앞에서도 그렇고, 그 여자들 앞에서도 그렇고 단 한마디도 못했어.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었는 데에도 말이야.”
[그러게요. 성깔 +10의 위엄을 못 봐서 저도 아쉬웠어요.]
이 순간에도 장난질이냐며 나는 정색을 했다.
[그런 무서운 얼굴 하지 말라고요. 진짜로 아쉬워서 그러니까.]
“후... 그래. 오늘 오전에 도와준 것도 있으니까 참는다.”
그리고 나는 어플에게 하소연이자 다짐을 했다.
“아무튼! 너에게만 말하는 건데, 이번 계약 건에 대해서 절대 걱정 마. 나도 내 나름의 방식을 가지고 꼭 어떻게든 해결할 테니까!”
[네네 전 주인님을 믿습니다!]
“갑자기 웬 주인님?”
정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어플이었다.
***
며칠 후, 결국 나는 차도진과 광고 계약을 했다. 계약금은 무려 10억 원... 광고 촬영을 하면 나머지 잔금 10억 원을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통장에 찍힌 자릿수를 보며 황홀경에 빠졌다.
‘살면서 이렇게 큰돈을 만질 줄이야...’
그러다 정신 차리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계약을 한 후, 나중에 알고 보니 TV 광고를 찍는 촬영지가 무려 히말라야 산맥이었다. 동네 뒷산을 오르는 것조차도 힘들어하는 내가, 히말라야를 오를 수 있을까? 그것도 무려 7일간이나 산을 타고 가는 강행군인데?
저질체력인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을 거 같았다. 잘못하면 계약금을 토해내야 할 수도 있었다. 나는 체력적인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어플에게 물었다. 그러나 나온 답변.
[기본 능력치 중 성깔을 올리는 게 어떨까요?]
“뭐?”
[그러니까 체력을 올려주는 능력치는 없으니까, 성깔을 올려서 악바리로 히말라야를 등반하라는 거죠. 어때요? 굿 아이디어?]
정말 이 녀석의 머리에는 뭐가 들어 있을까. 현실이었다면 아마도 등짝 스매싱을 있는 힘껏 내려쳤을 거다.
.
“농담하지 말고, 정말 등산하는 데 도움 되는 스킬 없어?”
[글쎄요. 이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는데.]
그러더니 스킬 목록을 검색하는 어플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화면에 띄어진 하나의 스킬.
“행복 전도사...?”
나는 어플이 띄운 스킬 설명을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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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전도사]
모든 걸 다 가진 사람. 세상에 있는 모든 행복이 나에게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언제 어디서든 장소를 구애받지 않고 행복하다. 그 행복을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해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행복을 전도한다. 슬프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 쓰면 좋은 힐링 스킬.
지속시간: 1시간
쿨타임: 1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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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괜찮은데...?”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체력이 되지 않으면 행복하다고 정신승리를 하면 된다는 건가? 나는 이 스킬을 습득하자며 바로 퀘스트 조건을 읽었다.
① 열 명의 사람에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노래 불러주기
② 열 명의 사람에게 욕을 해달라고 말하고, ‘그래도 난 행복해.‘라고 외치기
③ 열 명의 사람에게 새잎 클로버를 선물하기.
역시나 그렇듯 정상적인 퀘스트가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③번은 해볼 만하다는 것이었다.
히말라야 등반까지 남은 시간은 3일. 나는 그 안에 퀘스트를 완료하자고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