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 후 할머니 배는 나아졌지만, 살아간다는 개념보단 여전히 죽어간다는 개념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예고 없이 죽는 사람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폭탄 돌리기 게임처럼 닥쳐올 죽음을 알고 살아간다면 어떨까?
나의 죽음도, 너의 죽음도, 형제와 부모님의 죽음도.
올해에는 친구 아버지가 두 분이나 돌아가셨다.
한 친구는 아직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믿기지 않는다고 했고, 다른 친구는 그다음이 내가 될 줄 몰랐다고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실감이 나지 않아, 가족들이 모인 장례식장에서 자기도 모르게 아버지는 어디 있는지 찾았단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천운영의 단편 소설 '엄마도 아시다시피'가 떠올랐다.
소설 속 화자는 엄마를 잃은 중년 남자다. 엄마의 장례식을 치른 후 홀로 식당에서 해장국을 먹는다. 셔츠에 국물이 묻자, 손수건을 찾는다. 손수건이 보이지 않자 흐느낀다. 엄마가 항상 챙겨주던 손수건이 없다는 것이다. 엄마가 사라자 손수건도 사라지고, 손수건이 사라지자 화자는 서글프게 운다. 나는 이제 고아가 되었단다.
그 소설을 읽으며 생각해보았다.
우리 엄마는 돌아가시면, 내 어떤 물건을 가지고 가실까?
엄마가 지금도 나를 위해 챙겨주고 있는 건 무엇일까?
근데 난 왜 내가 엄마보다 빨리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는 거지?
역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고흐는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 건 별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세상에 그런 일이 가능키나 할까?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니?
별까지 걸어간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알 수가 없다. 죽음이 평화로울 수 있다는 건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이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인생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는 어쩌면 매 순간이 자신감과의 싸움인지도 모른다.
칭찬을 듣거나 계획한 일이 잘되면 자신감이 충만했다가도, 실패를 하거나 쓴소리를 들으면 연기처럼 자신감이 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참 단순하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니까.
그리고 이건 어쩔 수 없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 휴먼이고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지구 상에서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을 하는 이상 비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비교는 곧 평가를 불러일으키고 결과에 따라 우리의 자신감은 달라진다.
한창 자신감이 떨어졌던 시절.
60억 지구인이 만든 이 시스템에서 나 홀로 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한 마디로 이 지구 상에 나밖에 없는 것이다.
홀로 직장에 다니고, 홀로 글을 쓰고, 홀로 즐기고, 홀로 먹고, 홀로 잠을 자는 거다. 혼자 있기 때문에 평가받을 일도 없어 자신감이 떨어질 일도 없지만, 오를 일도 없다. 다만 내가 하는 일에 순간 뿌듯함을 느낄 수는 있다.
그런데 그런 세계가 즐거울까?
그런데 그렇게 되면 잃는 게 너무나 많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계에서 얻을 수 있는 긍정적인 것들은 모두 버려야 한다. 참 재미없는 세계이다. 어디서도 존재감을 드러낼 수 없다.
유구한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은 참으로 강력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만큼 상처도 받았다. 상처를 받은 만큼 즐겁기도 했다. 그런데 연약하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밀집된 인간은 지성과 끈기를 발휘하지만, 개개인은 너무나도 연약하다.
신은 왜 이렇게 인간을 나약하게 만든 것일까?
신도 보호받아야 할 정도로 연약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인간을 만들었을 때, 자신감이 떨어지지 않았을까?
인간처럼 불완전하고 불안한 존재를 보며.
그래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사랑을 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인지도 모른다. 혼자서는 절대로 만들 수 없는 감정을 관계를 통해 만드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며 의지해 떨어진 자신감을 그나마 붙들어본다. 혼자서는 해낼 수 없는 관계를 통해. 너를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초라해진 나를 다시 한번 사랑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