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계가 마을로 온 날]을 읽고..
이 책을 접하게 된 것은 내 머리에 ‘인류’라는 키워드가 둥둥 떠다니는 시기였다. 사람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고 ‘인류’였다.
처음 그 단어가 내 머릿속에 들어온 건, 어떤 배우의 시상식 소감에서였다. 올해 24년의 백상예술대상에서 영화부문 여우조연상을 영화 ‘화란’의 김형서 배우가 받았다. (우리가 아는 밤양갱을 부른 가수 ‘비비’가 김형서 배우다). 상을 받을 줄 모르고 무대에 올라 당황스럽고 감격한 표정으로 울며 소감과 감사인사를 이어가다 마지막에 그녀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단어 ‘인류’
(고마운 분들을 언급한 후)
“또 누가 있지. 제가 지금 생각이 잘 생각이 안 나는데요.. 아아. 이 세상에 영화와 드라마를 만든 ‘인류’에게 감사해요 “
그다음 그 단어를 다시 보게 된 건, 어느 북토크에 가기 위해 집어든 책이었다. 책 제목은 [인류세를 사는 10대를 위한 엄마의 환경수업]. 그때까지 ‘인류세’가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던 나는 속으로 ‘뭔가 인간이라는 것만으로도 내야 되는 세금 같은 건가’ 싶었는데, 이는 지질시대를 나타내는 용어였다. 지구에서 인류라는 한 종으로 인해 매우 급작스럽게 환경이 변화되고 있는 지금 이 시대를 지질학적으로 ’ 인류세‘라고 부른다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의 잘못된 판단과 행동이 지구에 큰 변화를 만들어 내고 그 결과가 이 땅에 속속 쌓이고 기록되고 있는,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가 바로 ’ 인류‘세다.
아 그래 우리는 ‘인류’였다. ‘인류’가 이 세상의 어떤 기준과 가치를 초월하여 근본적으로 우리를 묶어내는 단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모두 인류‘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생기는 동질감, 연대감이 있다. 지질학 용어에 사용되는 것을 보더라도 ‘인류’라는 단어는 인문학적이기보다 다분히 과학적인 단어라는 느낌이 들곤 한다. 그럼에도 비슷한 의미를 가진 ’ 사람‘ 혹은 ’ 인간‘과 같은 단어와 비교해 보았을 때, 뒤에 사랑 애(愛)를 붙이면 너무나 찰떡이다. 인류애.
이렇게 ‘인류’로 시작해서 꼬리를 문 생각이 머릿속에 오고 가는 중에 이 책을 만났다. [온 세계가 마을로 온 날]
이 책은 캐나다의 작은 섬 뉴펀들랜드의 갠더(Gander)라는 한 마을에서 6일 동안 실제 있었던 일들을 담고 있다. 기자였던 작가 ‘짐 디피디’가 직접 해당 기간 동안에 그 마을에 있었던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현장을 취재하며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엮어낸 논픽션 스토리이다. 마치 르포 기사를 읽는 것 같기도 하고, 다큐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이 담고 있는 6일은 바로 2001년 9월 11일 화요일부터 9월 16일 일요일까지이다.
2001년 9월 11일 오전, 뉴욕의 쌍둥이 빌딩으로 불리던 세계무역센터 건물과 미국 국방부 건물 ‘펜타곤‘에 총 3대의 비행기가 충돌하였다. 실시간으로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쌍둥이 빌딩에 충돌한 두 대의 비행기와 무너져 내리는 세계무역센터 건물을 보며 충격에 빠져있던 그 시간에 세계 각 국에서 미국으로 향하던 수백 대의 비행기들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미국은 영공을 폐쇄했고, 미국을 향하던 비행기들은 갈 곳을 잃었다. 막 출발한 비행기들은 회항을 했겠지만 바다 한가운데를 지나 미국에 근접했던 비행기들은 돌아갈 수 없었고 현재 있는 위치에서 가깝거나 미국 인근의 나라로 비상착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캐나다 등의 나라들이 자국의 공항을 열어 갑자기 갈 곳이 없어진 전 세계에서 온 비행기들을 받아들였다. 그중 한 곳이 캐나다 뉴펀들랜드의 한 도시 ‘갠더’였다.
이 책은 인구 1만 명의 작은 마을 ‘갠더’에서 갑자기 전 세계에서 찾아온 35대의 비행기와 6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일주일 동안 어떻게 환대하고 위로하고 함께 하였는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중에 어떤 비행기는 4번째 폭탄이 되었을 수도 있고, 어떤 공범이 그 비행기에 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의심, 보고도 믿을 수 없는 테러 상황에 대한 절망감과 상실감, 계획했던 일상이 무너져 내린 것에 대한 허탈함. 아마 비행기에 타고 있었던 사람들도, 이들을 맞이한 마을 사람들도, 바로 그 시점에 이 모든 감정의 소용돌이 안에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사람들이 각자 다른 욕구와 스토리를 가지고 그 힘든 시간을 함께 견디고, 마을의 주민들이 자신들의 일상과 공간에서 어떻게 이들을 돌보고 함께하였는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여러 에피소드들로 보여준다.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이런 마을이 있지?” 생각이 들었다. 그 6일의 시간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지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어떤 사전에 정보도 없이 몇 시간 전 일어난 말도 안 되는 테러로 갈 곳이 없어진 낯선 사람들을 받기로 결정을 하고 하루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세팅을 할 수 있었을까? 살펴보면 마을의 다양한 주체들이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우리의 역할은 무엇이다라는 것을 이미 잘 인지하고 주체들 간의 긴밀한 연결이 기반이 되었던 것 같다.
공항에 모인 30대가 넘는 비행기 안에 있는 불안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차례차례 땅으로 내리고, 수속을 밟는 동안 마을은 분주하게 환대를 준비한다. 단순히 몇 십 명, 몇 백명의 사람들이 아니라 마을 인구의 50%가 넘는 6천여 명의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지친 몸을 뉘이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 숙소를 마을에 흩어져 있는 교회 예배당, 마을 체육관, 시민단체와 학교들의 강당 등 숙소로 사용될 수 있는 공간들이 정해졌다. 그리고 공항에서 그 공간으로 이 많은 사람들을 이동시키기 위해 마을 학교의 스쿨버스들이 당시 진행하고 있던 파업을 중단하고 공항에 집결했다. 적십자사, 라이온스클럽, 사회복지기관, 교회 등 마을의 자원봉사 커뮤니티들이 공항과 숙소로 집결하여 피곤하고 지친 사람들에게 제공할 따뜻한 수프와 샌드위치를 준비하고 숙소에 도착하는 사람들을 먹일 준비를 했다. 더불어 마을의 병원, 소방서, 경찰관, 마트까지 크고 작은 조직들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지원하고 함께 했다.
이렇게 마을의 각 조직들은 자신의 역할을 잘 인지하고 수행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 조직들이 적재적소에 투입될 수 있었던 것은 그 기저에 기본적으로 마을 행정기관(소방서, 경찰서, 공항 등)과 민간 커뮤니티가 유기적으로 소통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 자세하게 설명되지 않았지만 에피소드들에서 지원이 필요한 곳이나 사람에 대한 정보를 유기적으로 주고받는 장면이 여러 곳에서 보였다. 이 환대와 가치를 담은 시스템은 재난 상황이라 특별히 작동한 네트워크가 아니라, 마을의 다양한 대소사가 있을 때, 작동하고 경험했던 것이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급작스러운 상황에도 우왕좌왕하지 않고 투박하지만 따뜻한 환대, 기본적인 생활을 지원할 준비를 하게 한 것은 이 일상적으로 작동하는 소통과 시스템이 그 역할을 한 것이 아닐까.
기본적인 생존과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숙소, 음식, 의료, 위생은 사회적인 시스템을 통해 마련이 되었다. 하지만 책에서 보이는 스토리들은 단순히 생존을 위한 지원이 아닌 생전 처음 와보는 낯선 곳에 피곤한 상태로, 심리적인 충격과 상처를 가지고 도착한 사람들이 마을에 있는 동안 마음 편히 각자의 필요에 맞게 대접을 받은 내용들이었다. 이 돌봄의 영역은 마을 주민들 하나하나의 행동에서 비롯이 되었다. 또 하나의 “어떻게 이런 마을이 있지?” 싶은 질문에 이어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있지?” 란 질문이 이어졌다.
언제든 손님들에게 문을 열어줄 준비가 된 주민들은 단체 숙소가 마땅치 않은 노인과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집 방 한 칸을 내어주고, 언제든 누구나 와서 씻을 수 있게 집 화장실을 개방하고, 필요한 것을 사거나 이동할 수 있도록 운전을 해주고, 매일의 밥을 함께 만들어 숙소로 보내 먹이고, 집에서 각자 빨아와 뽀송한 수건을 제공했다. 동네의 슈퍼마켓들은 누구든 필요한 생필품을 가져갈 수 있도록 오픈하고, 디즈니랜드에 못 가게 된 아이들을 위해 청소년 친구들이 학교를 디즈니랜드로 꾸미고, 교외 지역으로 차를 몰고 데려가 관광을 시켜주고, 약을 먹어야 하는 환자들을 위해 마을 약국들이 챙겨주고, 비행기를 함께 타고 온 동물들을 위해 동물보호단체와 수의사들이 비행기 화물칸의 동물들을 챙겼다.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주민들이 이렇게 손님들을 위해 마음을 내고 생업을 중단하면서까지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주민이 이 손님들에 대해 접하고 공감하고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이야기들을 잘 살펴보면 이 마을의 주민들은 누구나 1개 이상의 마을 커뮤니티에 속해 있었다. 기본적으로 교회와 학교라는 조직에 속해있었고, 그 외에 자원봉사나 자체적인 커뮤니티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교회와 학교는 이 작은 사회에서 커뮤니티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이미 속해있는 커뮤니티를 통해 머물고 있는 승객들을 접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개별적인 상황을 이해하고 그에 맞는 자원을 할 수 있는 선에서 지원하려고 하는 마음을 충분히 낼 수 있었다. 혼자가 아니라 옆에 함께 해주는 이웃들도 있었으니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승객들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어찌 보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마음의 위안을 받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 갠더라는 마을의 주민들은 그 역할을 충분히 해 주었고, 주민들의 환대에 마음이 열린 승객들도 함께 서로 의지가 되며 그 시간을 버텼다.
이 책의 부제는 ‘가장 어두울 때의 사랑에 관하여’이다. 재난 상황에서 모두가 자신의 것만 챙기며 혼돈과 탐욕의 카오스로 갈 것 같지만, 그럴 때에 우리 인간은 더 인간다운 인류애를 발휘한다. 그것은 그 재난의 상황에 고통을 받는 누군가에 대한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맹자가 이야기했던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은 인간이 누군가의 고통과 위급한 상황 앞에서 이에 차마 어쩌지 못하고 구하고, 곁을 떠나지 못하는 마음이라는 것. 이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인류의 유전자 안에 ‘고통’이라는 것에 대한 공통의 공감 버튼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누구나 각자의 고통과 비극을 안고 사는 법이니까. 그리고 우리는 서로 의지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유전적으로 새겨져 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마을에 착륙한 승객들은 난민이라기보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 같은 대접을 받았다고 했다. 바로 옆 한 곳에서는 인간성의 상실을 보여주는 참상이 있었고, 또 다른 곳에서는 인류애의 희망을 보여주는 연대가 있었다. 단순히 관광을 온 사람들이 아니라 끔찍한 재난을 피해, 어쩌면 그 재난을 맞닥뜨렸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가진, 가까운 누군가가 희생된 아픔을 겪고 있는, 일상이 모두 어그러져버린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을 맞이하고 필요한 것을 챙겨주고,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울고 웃고 위로하고 기뻐하며 연결이 된 마을 주민들은 단 일주일 동안 함께한 관계이지만 그 연대의 깊이는 한 사람의 인생의 전환을 가져올 만큼의 변화를 만들었다. 이 연대의 다른 말은 사랑, 인류애일 것이다.
인류라는 가슴이 웅장해지는 키워드로 시작했지만, 이것은 결국 나의 이야기이다.
“나는 어려움에 처해있는 낯선 이를 위해 나의 집 문을 열어줄 수 있을까? 그가 필요로 하는 것들 듣고 정성을 기울일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 가족은, 우리 마을은 그렇게 함께 행동할 수 있을까? “
책에 런던에서 미국으로 가는 길에 이 마을로 오게 된 랍비 수닥의 이야기가 나온다. 랍비 수닥은 생전 처음 만나는 전통파 유대인을 환대하고 따뜻한 관심을 보여준 마을 주민들과 이 많은 난민과 같은 사람들을 지원하고 대접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있던 런던과 이 뉴펀들랜드 지역이 왜 차이가 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랍비 수닥은 두 지역이 그렇게 다른 이유 중에서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학교를 둘러보면 부모와 함께 봉사하러 온 젊은이가 꽤 많았다. 랍비 수닥이 보기에 이거야말로 공동체의 진정한 모습이었다. 신앙과 공통의 가치로 연결된 공동체. 랍비는 자신이 뉴펀들랜드에 오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이 사실을 되새기기 위해서였다고 믿었다. “
이 작은 마을에서 이 많은 사람들을 환대하고 돌볼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시스템이 잘 작동한 것도 크지만, 결국은 그 시스템을 구성하고 있는 개인개인이 낯선 이들에게 마음과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했고, 내가 있는 자리 할 수 있는 선에서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을 즐겁게 나누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감과 연대의 모습은 기존의 생활 안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함께 나누었기 때문에 그러한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인류애라는 거창한 것이라기보다, 한 명 한 명의 사랑, 돌봄, 환대의 마음이 큰 재난 앞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시스템도 중요하지만 그 시스템이 잘 작동할 수 있는 디테일과 사랑, 위로를 기반으로 한 연대는 사람 하나하나에게서 시작된다는 것. 이제 그러한 사람들의 연대의 마음은 어떻게 생겨나는지, 그 마음밭은 어떻게 키워지는지에 대해 고민이 시작되었다. 지금 내가 마음먹고 해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가족, 혹은 친구들 손을 잡고 무엇을 보고 이야기 나누고 해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