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배태성(背胎性)이라는 어휘를 처음으로 접했다. 사회경제학자인 칼 폴라니가 중시하는 개념이기도 하다는데 난 조직 관리 차원에서 등장하는 직무배태성이론이 처음이었다. 조직 내 이직율을 낮추려면 직무배태성(job embeddedness)이 높아야 하는데 남을 배척하는 성질인 배타성과는 달리 아기나 새끼를 갖고 싶은 성질이라는 배태성이 높아야 발전 잠재력이 높다는 얘기다.
배태성이란 착근성(着根性)이란 말로도 통한다. 사전적으로 뿌리내린다는 뜻으로 구성원이 조직에 근속하는 영향력을 말하기도 하고, 한 장소에 오랜 기간 거주할 경우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는 뿌리의식을 뜻하는 장소 착근성이라는 용어도 있다
요즘 너나없이 뜨내기 삶을 살아가는 디아스포라 시대라 그런지 난 ‘배태성’이나 ‘착근성’이라는 낯선 용어에 마음이 착 달라붙었다.
내 맘대로 배태성이나 착근성을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 도입해 본다면 우리나라 경우 어느 도시, 어느 지역이 배태성이나 착근성이 높은 곳으로 꼽을 수 있을까?
최근에 다녀온 곳이라 그랬는지 전라남도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이 금방 떠올랐다. 광주비엔날레 끝무렵에 다녀왔는데 비엔날레 전시관에서 본 대규모 국제 전시보다도 오랫동안 빈 집으로 있던 70년대 주택이나 옛 파출소 건물에서 열리기도 하고, 백년 고택을 비롯 납작한 지붕과 낮은 담으로 연결되는 작가들 오픈 스튜디오 중심의 양림골목 비엔날레 전시가 내겐 더 인상적이었다.
양림골목 비엔날레는 양림동에 작업실을 갖고 있는 한희원화가를 비롯 이이남, 이강하 등 여러 미술가들이 뜻을 모은 양림미술관거리협의체에서 시작되었다.
올해가 세 번째로 양림동 전역이 지붕 없는 미술관으로 바뀌는 마을미술축제를 다정하게 해오고 있었는데, 30주년을 맞이한 15회 광주비엔날레 감독인 니콜라 부리오가 협력 차원의 회의차 양림동에 왔다가 양림동의 매력에 빠져 적극적으로 제안을 해왔다.
같은 기간에 광주비엔날레 주제전 8곳과 6개소의 파빌리온, 그리고 8군데 작가의 작업실을 오픈스튜디오로 구성하여 광주비엔날레의 또 다른 전시장으로 함께 하자는 것이었다. 난 양림비엔날레 조직위원회가 먼저 구애하여 양림동까지 확장되었겠거니 짐작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양림골목 비엔날레가 광주비엔날레의 초대를 받은 것이었다.
하긴, 광주비엔날레 현장에 가기 전까지 비엔날레 전시 주제가 ‘판소리’라고 하여 당연히 남도 판소리줄 만 알았다. 시각예술인데 판소리를 주제로 삼다니 그 어색한 연결이 어떻게 구현될지 궁금했는데 광주에 와보니 전시 주제인 판소리는 예술 씬이라는 ‘판’, 동시대 예술의 다양한 ‘소리’를 뜻했다.
아울러 남도의 ‘판소리’와 중의적 의미를 갖고자 한 니콜라 부리오 감독에게 백년 간의 근현대 역사가 고스란히 살아있는 양림동만큼 좋은 전시 장소는 없지 않았을까?
마침, 찾아온 기회를 양림골목비엔날레 전시감독을 맡은 호랑가시나무언덕의 정헌기주인장이 양림 고유의 지역성과 예술성이 조화로운 기획으로 매력을 살려냈다.
나는 기간 중 양림골목비엔날레 아트버스의 구성원으로 참여했다. 일행들은 모두
양림동의 ‘여행주민’으로 명명됐다
지역소멸이란 위기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지역의 관계인구의 중요성이 강조되곤 하는데 관계인구란 용어가 통계적인 수치에 머무는 어감인데 비해 ‘여행주민’이란 단어의 조합은 잠시 다녀가지만 양림동 주민으로 활짝 품을 열어 환대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외지인을 ‘여행주민’이라고 불러주는 양림만의 감각과 태도에 양림 고유의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렇게 용어부터 섬세하게 맞이해주니 내가 양림동을 다녀와서도 다시 양림동에 대한 글을 쓰게 만드는 게 아닐까?
1994년 MBC 라디오 방송작가 시절, 여성시대 공개방송 녹화차 광주비엔날레 첫 해 에 온 적이 있었다. 중간 중간 출장 삼아 오기도 하고 지인을 만나러 오곤 했는데 어느덧 30년 차가 된 광주비엔날레에 와보니 기억이 새로웠다. 당시 비엔날레 전시장이 아닌 광주시립미술관이 있는 공원 인근에서 방송을 했었다. 초대손님으로 ‘사평역에서’ 란 시로 유명한 곽재구 시인이 출연해 광주 정보를 낭만적으로 전해줬다. 그리고 뒤풀이 겸사겸사, 곽시인은 광주 예술가들의 아지트인 곳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광주 천변, 불로동이란 동네에 등나무가 예사롭지 않게 휘어져있던 작업공간이었다.
난 거기서 그림을 그리고 그림보다 더 깊은 글을 쓰는 한희원작가를 처음으로 봤다.
그는 곽재구 시인의 절친이다. 그는 별이 총총한 밤하늘 아래 달려가는 검은 기차를 그린 ‘여수로 가는 막차’부터 붉게 떨어진 동백, 눈부시게 노란 11월의 은행나무, 색감은 서늘한데 따뜻하게 다가오는 정미소, 그리고 당신이 살고 있는 동네 양림동의 골목을 즐겨 그리는 작가였다. 나는 한희원작가의 푸른밤 색깔에 사로잡혀 양림동 골목이란 제목의 작은 그림을 덜컥 사들고 오기도 했다. 나의 첫 번째 콜렉션이었다.
아, 그런데 삼 십년이 지난 요즈음, 곽재구시인은 쥬스컴퍼니(이한호대표)가 운영하는 양림동의 앵커시설인 복합문화공간, 십년 후 그라운드의 상주작가처럼 머물러 있었고, 한희원작가는 양림동에 살면서 한희원미술관을 만들고 양림골목비엔날레의 위원장으로 지역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었다
아트투어 기간 중 십년후 그라운드에서 열린 양림골목비엔날레 아트살롱 파티도 경험했다. 서로에게 감사와 존경을 보내는 우정과 연대의 현장이었다.
그 곳엔 조직위원회 위원장부터 각 분과의 위원을 비롯 자원봉사자와 도슨트, 그리고 참여 작가까지 함께 한 모든 분들이 자리했다. 정치인의 긴 인사말로 지루하게 하는 다른 지역과 달리 양림은 짧은 인사와 함께 온전히 지역에 살고 있는 예술가와 주민이 주인공이었다.
뿐 만 아니라 동네 교회의 목사님 세 분이 나란히 앉아서 환한 표정으로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했다. 동네 목사님들은 비엔날레 기간 중에 교회주차장을 기꺼이 열어놓고 양림동을 찾는 많은 여행주민을 반가이 맞은 터였다. 주민자치회 회장도 전직부터 현직까지 두 분이 사이좋게 앉아 있었다.
전 이장과 현 이장의 갈등으로 바다 쓰레기를 치워서 정성스레 만든 설치작품과 성소 등 공공예술작품을 원상복구하라고 몽니부리는 굴업도의 사례와는 천양지차다.
사회경제학자도 아닌 내가 이 용어를 맘대로 써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난 굴업도와 양림동사례를 보며 배타성과 ‘배태성’을 떠올린다.
2025년, 나의 문화로 ‘배태성’을 배태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