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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향인 아가와의 영국살이 준비하기

31개월 : 낯섦 투성이일 그곳에서 너의 마음이 염려돼

by 여울맘

나는 내향인이다. MBTI가 유행인 요즘 시기에는 "I"라는 말로 나의 내향성을 표현하는데, 나와 친한 사람들은 내가 "I"라는 사실에 흠칫 놀란다. 친해지면 누구 못지않게 까불거리지만, 그렇게 친해지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그런 엄마를 닮아서 우리 아기도 꽤나 낯을 가린다. 어린이집에서 언니 반으로 올라간 지 3달째이지만 아직도 새로운 담임 선생님 앞에서는 얼어붙어 버리고,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선생님 앞에서나 겨우 입을 떼고는 한다.


그래서 오는 8월 아기와의 영국 출국 준비가 더욱 걱정이 된다.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이렇게 낯을 가리는 아기인데 낯선 인종과 낯선 문화 속에서는 얼마나 두려울까. 사실은 엄마인 나도 낯선 곳에서의 영국 유학 생활이 너무나 두려운데 아무런 선택권도 없이 낯선 곳에 떨어질 아기는 얼마나 더 두렵겠나.


영국생활 적응에 도움이 될까 싶어 며칠 전부터 아기에게 처음으로 동영상을 보여주고 있다. "Going to nursery"라는 영국 유치원을 다니는 아기의 일상을 주제로 하는 유아용 드라마이다. 매일 10분을 정해두고 하나의 에피소드를 반복해서 보여줄 생각이다. 언어는 결국 대면 상호작용을 통해서 가장 잘 습득된다고 하니 영상을 보여주는 동안 나도 여전히 옆에서 앉아 같이 영어로 같이 종알대며 아기의 영어흡수를 도와주어야 한다. 과감히 동영상을 노출하는 대신에 아기가 낯선 환경에 조금 더 빨리 적응하고, 필수 영어표현도 조금은 배워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아기는 처음 보는 동영상이 무척이나 재미있는지 꽤나 집중해서 동영상을 봐주고, 상황이 이해가 안 가면 나에게 물어보기도 한다. 동영상을 보여주며 우리가 저런 곳에서 살게 될 거라고 이야기해 주는데,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겨서 싫어"라고 얘기하더니 요새는 "엄마, 아빠도 같이 가는 거야? 할머니도 같이?"라고 좀 더 현실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애써 조금씩 마음을 준비하는 효과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무엇보다 엄마가 낯가리고 주눅 들어 있는 모습을 보면 아기도 더욱 주눅이 들겠다 싶어서 나의 영어공부에도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벌써부터 영어로 스트레스받게 될 내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매번 영어로 생활하는 건 큰 도전이었지만, 이번에는 영국식 영어라 더욱 힘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혈혈단신 학생뿐만이 아니라 아기의 학부모로서도 어린이집 선생님과, 주변 이웃들과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니 찌질함과 부끄러움은 나만의 몫이 아니다. 적어도 엄마가 당당하게 영어로 이야기하고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야 아기도 빨리 적응할 게 분명하다. 우선은 영국드라마를 반복적으로 틀어놓으면서 귀와 입을 트이고, 틈나는 대로 명문장들을 필사하면서 부족한 능력들을 집중 육성해 보아야겠다.


낯가림이 있는 아기를 키운다는 건 꽤나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일이다. 나는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지독하게 낯가림을 겪어내고 있는 탓에 아기의 마음을 조금은 더 배려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애써 위로해 본다. 내가 낯가리는 아이로 성장하며 가장 불편했던 것은 누군가 나를 "얘가 낯을 가려요"라고 처음부터 단정 지어 버리는 거였다. 낯섦에 대한 자연스러운 불편함이 "낯가린다"라는 딱딱한 말로 포장되는 순간 나는 빼도 박도 못하게 낯을 가려야 하는 아이가 되어 버렸다. 말의 힘은 굉장히 무서워서 "낯가리는" 아이가 그 이후에 "낯을 가리지 않는" 아이가 되기는 어렵다. 나도 요새 무심코 어색한 상황을 타개해 보고자 "아기가 낯을 가려요"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매번 바로 후회한다. 우리 아기는 "낯을 가리"는 게 아니라 "친해지는데 시간이 조금 필요"한 거라고 조금 더 순화해서 표현해 봐야겠다.


아기를 키우는 것은 부모인 나의 약점을 계속 들여다보는 일이라 했던가. 낯선 곳에 대한 나의 두려움이 아기에게까지 투영되어 요즘 나의 관심사는 온통 새로운 곳에서 우리 가족이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아기도 같이 간다는 점을 핑계 삼아 나의 낯가림에도 충분히 대비하기 위한 시간을 확보하고 있다. 부디 이 시간이 헛되지 않기를. 영국에서의 2년이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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