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개월 : 너를 후회 없이 사랑하고 나야 비로소 성이 찬다
오는 8월 영국유학을 준비해야 한다는 핑계로 5월부터 다소 이른 휴직을 신청했다. 사실은 지난해 복직 후 1년간 회사에서의 생활이 너무나 고달팠던 탓이었다. 조금만 더 견디면 끝이 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휴직은 비겁하게 회피하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승진을 앞두고 결국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전형적으로 도망을 쳐버렸다. 처음으로 정신과 문턱을 넘었을 정도로 힘이 들었고, 사무실에 앉아있는 내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다.
처음에는 아침에 눈을 뜨면 회사를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금세 기분이 괜찮아지는 듯했다. 그러나 패배자가 되었다는 자책감에 회사에 있는 동료들을 만나는 자리는 매번 불편했고, 회사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다시 숨이 턱턱 막혀왔다. 예상했던 대로 도피는 전혀 나를 구원해주지 못하는 것이었다. 패배감에 또다시 괴로워질 걸 알았음에도 왜 이리 회사 생활이 힘이 들었을까.
직접적으로는 당연히 회사에서의 업무가 과중했고 상사의 비위를 잘 맞추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하지만 직장 초년차에는 이보다 더한 업무도 잘 견뎌냈던 나였다. 이번에 유난히 나를 힘들게 했던 건 복직하고 나서도 여전히 육아를 소홀히 하고 싶지 않다는 부담감이었다. 내가 한창 바빠졌던 시기에 말이 트였던 아기는 공교롭게 엄마를 그리워하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엄마양은 회사에 갔어. 엄마양이 회사에 가면 아기양은 할머니랑 놀아야 해."
"엄마는 일하러 갔어."
"할머니, 오늘 엄마 일찍 온대?"
이런 말을 어린이집 선생님이나 할머니를 통해 전해 들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졌다. 돌이켜보면 그저 모두가 겪고 지나가는 시기인데 나는 그게 못내 견디기 힘들었다. 매일 아침 아니면 저녁에라도 아기 얼굴을 꼭 보아야겠다는 생각에 미혼 때는 거침없이 불사했던 야근과 새벽출근도 최소화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생각해도 업무에 최선을 다하지는 못했고, 그건 어김없이 형편없는 결과로 이어져서 동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기 일쑤였다. 결국 나는 여태껏 겪어보지 못했던 치욕감과 수치감으로 정신과 약을 먹기 시작했다.
비겁하게 휴직으로 도피한 죄로 지금의 나는 다시 너덜너덜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어떻게든 육아와 일의 균형을 맞추고자 했던 선택을 후회하지는 못하겠다. 아기는 반년 새 또 훌쩍 커버렸고 작년의 아기는 내 커리어와 기꺼이 바꿀 만큼 넘치게 사랑스러웠다. 아기와 보내는 매 순간은 신기하게도 매번 새롭게 사랑스럽다. 어제는 혀 짧은 서툰 발음이 사랑스러웠다면, 오늘은 어제와 똑같은 자그마한 입으로 또박또박 엄마를 꾸중하는 게 사랑스럽다. 이 사랑스러운 순간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느새 얼기설기 내 기분은 그럭저럭 괜찮아진다.
사실 아기를 낳으면서 내 커리어가 다소 꼬였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건 전적으로 내 복리와 후생을 위한 선택이었으니 나중에 아기가 조금이라도 부채의식을 느끼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아기와 있는 시간은 사실 아기보다도 나를 위한 시간이다. 오전동안 이런저런 잡생각에 너덜너덜해졌던 내 마음은 하원 후 아기의 손을 잡는 순간 바로 말랑말랑 기워진다. 이 사랑스러운 아기의 내음과 말랑함과 깜찍함이 언제까지 갈지 몰라서 하루하루가 아깝다. 우리 아기가 너무 사랑스러운 탓에 나는 당분간은 아기를 향한 덕질을 멈추지 못할 것 같다.
어떤 워킹맘이 말하길, 30대는 회사에서도 나를 제일 필요로 하는 시기이고 동시에 집에서도 나를 제일 필요로 하는 시기라고 했다. 하필 회사에서도 가정에서도 내가 제일 필요로 되는 시기가 중복되는 탓에 워킹맘들은 지독히도 자기 자신을 갈아 넣든가 어느 한쪽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 선택의 기로에서 나는 결국 아기와 보내는 시간을 선택했다. 양쪽 모두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지만 선택은 불가피하다. 치열하게 사는 커리어우먼이 되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난 1년을 통해 내게는 아기와 함께하는 30대가 더 행복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요새는 아기와 후회 없이 사랑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탓에 매분 매초가 만족스럽다. 나를 번듯한 사회인으로 키워내기 위해 젊음을 투자하신 나의 부모님께는 조금 죄송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 때문에 아기와 보내는 시간 틈틈이 이와 병행할 수 있는 자기 계발이 없을까 기웃거리게 된다. 어쨌든 나의 삶의 중심은 지금은 사랑스러운 아기와의 시간에 자리 잡고 있고 아직까지는 꽤나 만족스럽다. 영국에서의 유학생활은 다시 한번 내 삶의 균형을 시험하는 시험대가 되겠지만, 거기서도 사랑이 충만한 삶의 중심을 잃지 않을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