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선한 가을, 런던에 왔습니다

한 달간의 런던생활의 단상들

by 여울맘

다소 숨 가쁘게 런던에 정착한 지 어느덧 한 달, 이제야 비로소 하루 24시간이 꽤나 헐거워졌다. 아침에도 굳이 알람을 맞출 필요가 없고, 천천히 내 호흡에 맞춰 그저 의식주의 욕구에 충실한 시간들을 보낸다. 동네 지리에도 익숙해져서 어느새 좋아하는 등하굣길이 생겼고, 품목마다 가격과 품질의 유불리를 따져가며 두세 곳에서 장을 보는 패턴도 잡혀간다. 본격적인 개강을 하였음에도 회사생활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자유도가 높은 시간들이 넘쳐난다. 이제 좀 ‘사는 것’ 같다.


런던의 인종 구성은 정말 다양하며, 대부분의 지성이 있는 시민들은 수준 높은 매너를 갖추었기에 인종에 의한 불이익은 사실 거의 안 느껴진다. (괜히 지나가면서 우리를 향해 왁 소리를 지른 저급한 영국인도 두 번이나 만나긴 했지만..) 게다가 도보 10분 거리 마켓에서 언제든 한식 재료를 구하고, 한식당도 갈 수 있는 센트럴 런던에 살다 보니 타향살이의 단점도 거의 느끼기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대체하기 어려운 건 가족과 친구들과의 관계이다. 웬만큼 외향적인 성격과 준수한 영어실력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이 동네에서 아싸를 면하기는 힘들다. 같은 석사과정 동기들은 학부과정을 갓 졸업하여 거의 열 살 차이가 나는데, 매번 똑같은 패턴으로 자기소개 인사를 나누고 나면 금세 어색하게 대화소재가 바닥나 버린다. 그나마 나는 남편과 아기와 함께여서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집-학교-공원만을 오가다 보면 내가 이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도시에서 왜 강제로 전원생활을 하고 있나 하는 회의감도 든다.


사실 여기에 온 가장 큰 목표는 커리어 전환을 모색하는 것이기에, 공부뿐 아니라 교수진 및 다양한 배경의 동기들과 네트워크도 중요하게 쌓아야 한다. 그동안은 정착한다는 핑계로 짬을 내기가 어려웠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잡페어도 기웃거려 보면서 한국의 일상에서 벗어나 도약할 기회를 엿봐야겠다.


이제 런던의 미친 물가에도 어느덧 적응이 되어버려서 런던생활 만족도가 꽤나 높다. 오기 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정말 훨씬 더 행복하다. 하루 종일 아기와 함께하며 조잘조잘 날로 늘어가는 아기의 사고력에 감탄하고 있다. 하루 걸러 런던의 온갖 공원마다 피크닉을 쏘다니며 선선한 런던의 가을을 만끽하고 있다. 적어도 가을의 런던은 날씨가 정말 좋다.


그 누구에게도 미안하거나 빚지는 느낌 없이 온전히 내 삶만이 존재한다. 내 시간의 주도권을 모두 되찾은 느낌. 영원하지 않기에 더 소중한 거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했으면 하는 순간들이다. 조금의 과장도 보태지 않은 진짜 행복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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