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몰라도 기죽지 않습니다

36개월 : 편견 없는 아기의 영국 사회생활

by 여울맘

영국에 온 지 한 달 여 만에 드디어 아기도 현지 널서리를 다니게 되었다. 영국에 오기 전 알아봤던 널서리들을 막상 방문해 보니 시설과 분위기가 별로라서 부리나케 집 근처 널서리들을 다시 알아보았는데 다행히 도보 5분 거리에 괜찮은 곳이 있어 10월부터 다니게 된 것이다.


약 두 달간 이런저런 어른들의 사정으로 가정보육을 해오고 있었는데 이게 아기에게도 조금 심심했던 모양이다. 널서리 사전답사에 동행했던 아기는 키즈카페 뺨치는 시설에 다행히 눈이 휘둥그레졌고, 자신이 좋아하는 페파피그 책을 보고는 집으로 돌아가기를 망설일 정도였다. 좋은 시그널이었다!


마침 아기와 방문했던 곳은 공립이라 교육 커리큘럼이 체계적이었고,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도 훨씬 밝았다. 원내 핸드폰 사용과 당류 반입을 엄격히 금지하는 원칙은 남편의 마음도 사로잡았고, 시간당 10파운드가 아닌 8.5파운드의 요금을 적용받을 수도 있다는 희소식이 더해져 다소 쉽게 마음을 굳힐 수 있었다.


아기를 등원시키기 전 우리의 가장 큰 걱정은 역시 아기의 적응력이었다. 한국에서도 새로운 반에 진급한 이후 반년 가량은 낯을 가리던 아기였다. 더군다나 요새 한창 한국어로 재잘대는데 재미를 붙인 아기인데 널서리에서 말이 안 통하면 좌절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런던에는 다국적 가정에서 태어나 영어를 못하는 원아가 매우 많고, 어른들의 염려와 달리 아이들은 놀라울 만큼 금방 적응한다고 선생님께서 아무리 호언장담하셔도 어미의 마음은 어째 놓이지가 않더라.


또 다른 걱정은 부모도 아기도 처음으로 라틴계 남자 선생님을 담임 선생님(여기서는 key person이라고 부른다)으로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한국에서도 우리는 아직 남자 선생님을 만나본 적이 없었고, 한창 아기가 배변훈련 중인 지라 옹졸한 어미는 그마저도 탐탁지가 않아 정중히 여자 선생님으로의 교체를 요청해보기도 했었다. 물론 편견과 차별 없는 어린이집에서는 받아들여줄 수 없는 요구사항이었다.


그렇게 잔뜩 걱정에 휩싸여 널서리 적응을 시작했는데, 웬걸 아기는 등원 2일 차부터 벌써 부모와 완전히 분리되어 씩씩하게 오전시간을 보냈고, 벌써 집에 돌아가기 싫다는 의사까지 내비쳤다! 그렇게 등원 일주일도 안되어 아기는 9시 반-15시 반을 어린이집에서 보내게 되었다.


모든 걱정은 다 어미의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친구가 생겼냐 물어보니 첫 주에는 “이름은 몰라. 내가 와츠유얼네임이라고 안 물어봤거든.”이라고 답하더니, 며칠 전부터는 마마인지 라마인지랑 놀았다고 자연스레 이야기한다. 와츠유얼네임이라는 표현을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도 눈치껏 그게 이름을 묻는 표현이라는 걸 알아채고, 선생님께서 친구이름을 부르는 걸 주워듣고 친구 이름을 내게 말해주는 듯 해 기특함에 또 눈물이 찔끔 났다. 어느 날은 영어로 작은 별 노래를 배워와 “이번엔 영어로 불러보자”, "이번엔 한국어로 불러볼까?" 하면서 자연스레 한국어와 영어를 오가며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반짝반짝은 이렇게 하는 거라며 노래에 맞춰 작은 손도 조물조물 돌려주는데 그게 또 너무나 깜찍하다.


그간 나름 머리가 굵어진 것인지 어째 한국에서 반이 바뀌었을 때보다도 더 빠르게 선생님에게도 마음을 열었다. 등원 며칠 만에 “이제 로베르토 선생님이 부끄럽지 않아. 선생님 볼이 귀여워~”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선생님 교체를 고민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울 정도로 좋은 담임 선생님을 만난 듯하다. 담임선생님께서는 본인의 유년시절 결핍까지 우리와 공유하시며 교사로서의 열정과 진심을 전해주셨다. 어쩜 우리 아기는 영국에서도 이렇게 선생님 복이 많은 건지 감사할 따름이다.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도, 인종과 성별이 달라도 나의 아기에게는 그 무엇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저 같이 놀이하면 즐거운 것이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지면 행복한 것이었다. 삼십 년을 더 산 나는 어쩜 이렇게나 많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것인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살아온 배경이 달라서, 의사소통이 자유롭지 않아서 온갖 이유를 들어대며 현지 친구들을 사귈 기회를 도망쳐 다닌 엄마가 또 많이 배우고 반성하게 된다.


등원한 지 이제 3주 차에 접어드는데 이제는 놀잇감들이 지루해진 것인지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고 가끔 떼를 쓰기도 한다. 하지만 또 저녁시간만 되면 하루 종일 재미있게 놀고먹었던 시간을 종알종알 이야기해준다. 저녁 식탁에 앉아 서로의 하루가 어땠는지를 묻는 게 전부인 우리의 소박한 일상이 너무나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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