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직장인들의 고민과 조금 다른 나의 퇴사 고민
나는 외국계 IT 기업의 프리세일즈 엔지니어이다. 대학원까지 꽉 채워 6년의 학업 과정을 마친 후 취업을 했고 직장 경력이 이십 년을 훌쩍 넘고 오십을 코앞에 둔 나이가 된 즈음부터 은퇴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십여 년의 짧지 않은 경력 동안 대기업 연구소, 외국계 IT 기업 2 곳, 총 3개의 회사를 거쳤다. 세 번째 회사이자 현재 근무하고 있는 회사에 가장 오래 있었는데 얼마 전부터 은퇴를 꿈꾸게 되었다.
외국계 기업에도 정년이 있지만 이십 년 넘는 근속기간 동안 정년을 채우고 퇴사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내부 경쟁이 치열한 외국계 기업의 특성상 나이 든 사람이 버티기가 힘든 탓도 있을 것이고 한국 기업에 비해 외국계 기업의 근로자 수명이 더 짧기 때문이기도 할 것 같다. 참고로 내가 근무하고 있는 기업의 근로자 평균 연령은 어림잡아 40세 정도이다. 임원 몇 명을 제외하면 30대 전후반 직원이 과반수 이상을 차지한다.
은퇴를 꿈꾸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나의 일을 사랑한다. 프리세일즈라는 직업에 대해 쓴 글들을 보면 알겠지만 나는 나의 직업에 대해 자부심과 보람을 느끼며 살고 있다. 그리고 회사의 어느 누구도 내게 퇴사하라는 압박을 준 적이 없고 맡겨진 업무를 누구보다 잘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예전에 어떤 선배가 외국계 회사에서는 나보다 어린 지사장을 만나게 되는 때가 퇴사할 때라고 말했는데 다행히 그동안 만났던 여섯 분의 지사장님 중에 아직 나보다 어린 사람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퇴사를 꿈꾸는 이유는 더 이상 도전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십 년 넘게 직장 생활을 했지만 피플 매니저로 승진을 하지 못했다. 진급을 해보려고 지원했더니 여성은 매니저를 할 수 없다는 기가 막힌 소리를 들었다. 나보다 훨씬 경력이 적은 남자 후배들이 이사 타이틀을 달 때 여성에게는 이사 타이틀을 줄 수 없다며 나에게만 기이한 타이틀을 붙여줬던 지사장도 있었다. 심지어 그 사람은 여성에게는 회사에서 제공되는 주차장 자리를 줄 수 없다고 했다. 프리세일즈 업무는 고객사 방문이 많아서 무거운 노트북과 장비를 들고 외근을 다녀야 하는데 여자라서 주차권을 줄 수 없다니. 차라리 여성은 프리세일즈를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라고 대들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시절 내 주위에는 온통 남자들뿐이었고 내 편은 하나도 없었다. 비 오는 날 한 손에는 무거운 노트북을 들고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외근을 가면서 21세기에 글로벌 기업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던 기억이 생생하다.
물론 이런 일들 모두 십여 년 전에 일어난 일이고 이젠 시대가 바뀌어서 많이 좋아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서기에는 나는 너무 지쳤다.
경력이 이십 년이 넘는데 피플 매니저를 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다른 회사로 이직하지도 못했다. 이직을 하려고 무던히 노력해 보았지만 피플 매니저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뼈아픈 실패를 경험했다. 그리고 이것은 이십 년 넘게 근무한 나의 회사에서조차 핸디캡이 되었다. 매니저 경력이 없는, 매니저들과 나이가 비슷한 IC(Individual Contributor)는 처지 곤란한, 어디에도 낄 수 없는 어정쩡한 그룹인데 어느덧 내가 거기에 속해 있었다.
물론 내가 다니는 회사의 본사(미국)에는 프리세일즈, 개발자 등 IC(Individual Contributor)로 일하면서 60세가 넘도록 일하는 직원들도 많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국 본사의 이야기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기억 중 하나가 미국 출장을 가서 본 프리세일즈 동료의 은퇴식이다. 은퇴하는 동료를 위해 팀원들이 준비한 은퇴식이었는데 전 세계 프리세일즈들이 모인 교육장에서 백여 명이 넘는 동료들의 축하를 받으며 은퇴하는 그의 모습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미국 본사의 경우에는 정년이 따로 없다. 그는 65세에 은퇴를 했고 흰머리를 휘날리며 백여 명의 동료들의 박수를 받으며 은퇴를 하는 그가 너무 멋있어 보였다. 그리고 나도 저렇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 멋지게 은퇴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십여 년이 세월이 흘렀고 나이가 들어서 보니 한국에서는 오십을 채우는 것조차 버겁고 힘들게 느껴진다.
그래서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어떻게 하면 잘 은퇴할 수 있을까, 언제 퇴사를 하는 것이 적당한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내가 운이 좋은 편이라는 것을 안다. 내 동료 중에는 사십 대 중반의 나이에 명퇴를 당한 사람들도 있다. 자녀 교육비, 부모님 병원비 등 돈이 가장 많이 필요한 나이에 아무런 대비 없이 회사에서 내팽개쳐진 후 아직도 다른 회사에 취업하지 못한 채 떠돌고 있다. 은퇴한 동료들은 절대 회사가 자르기 전에 나오지 말라고, 회사 밖으로 나오는 순간 너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고 진심어린 조언을 해준다.
그러나 나는 아름답게 은퇴하고 싶다.
삼십 대 중반의 팀원들이 나를 불편하게 여기기 전에 아름답게 회사를 떠나고 싶다.
치열하게 살아온 이십여 년의 커리어가 자랑스럽게 기억될 때 명예롭게 떠나고 싶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브런치에서 퇴사에 대한 글들을 구독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글도 쓰게 되었다.
내가 아직 일을 잘하고 있는지, 어느덧 꼰대가 되어 있진 않은지, 회사에 아직 필요한 존재인지 솔직하게 말해주는 그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삼십 대 중반의 팀원들과 은퇴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비슷한 연배의 남자 동료들과는 언제나 한 뼘 정도의 거리가 있으니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치열하게 고민한다. 어떻게 은퇴를 해야 할지, 언제 은퇴를 해야 하는지, 어떤 것이 아름다운 은퇴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본다.
매일매일 아름다운 퇴사를 꿈꾸며 은퇴하는 그날을 고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