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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자가 주최하는 송별회

by 아르페지오

퇴사를 앞두고 나의 송별회를 내가 주최하는 중이다.


20여 년의 회사생활을 돌아보며 고마웠던 이들의 이름을 적어보았다. 열명 남짓 되는 리스트가 만들어졌다. 어떤 이들은 나보다 먼저 회사를 떠났고 어떤 이들은 아직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2명 혹은 3명씩 그룹을 지어 약속을 잡고 만나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세심하게 장소를 골랐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을 위해서는 아늑한 레스토랑을 예약했고 술 한잔을 같이 하면서 회포를 풀어야 하는 이들을 위해서는 분위기 좋은 바를 예약했다.


송별회의 모든 비용은 내가 낼 거라고 미리 말했다. 그리고 고마운 이들을 작은 선물을 준비했다.


지난주에는 같은 회사에서 오랜 세월을 함께 한 후배와 고비 때마다 지혜로운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선배 언니를 만났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한 그녀들에게 특별한 선물을 하고 싶어서 선물에 이름을 새겼다. 우연히 립스틱 케이스에 각인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L 사 광고를 보았고 그녀들에게 어울리는 립스틱 색상을 고른 후 이름을 새겼다. 내 마음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손 편지를 쓴 후 정성스럽게 포장을 해서 건넸다.

어제는 팀 동료들을 만났다. 많은 추억과 시간을 공유하는 사이였기에 맥주를 한잔 하면서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눴다. 프리세일즈 팀에는 나보다 열 살 넘게 어린 동료부터 대여섯 살 어린 동료들이 섞여 있는데 신기하게도 취향이 비슷했다. MBTI이나 성향 테스트를 하면 유사한 성향이 나온 것을 보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이차에 구애받지 않고 잘 지냈다. 함께 출장을 가면 즐거웠고 회식조차 재미있었다. 이 사람들과 함께 했던 3년여의 세월이 가장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동료들을 위한 선물을 고민했는데 매일매일 사용하는 제품을 선물하고 싶었다. 마음에 드는 것을 찾지 못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니다가 그들에게 딱 맞는 제품을 찾았다. 베이크드 알래스카라는 비누를 보는 순간 그들을 위한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로라가 연상되는 화사한 색감과 시원한 향기가 알래스카에 가서 오로라를 보고 뛸 듯이 좋아하던 그녀들의 모습과 오버랩되었다. 한 사람씩 떠올리면서 그녀 혹은 그에게 어울리는 낫랩(재사용할 수 있는 천으로 된 포장재)을 고른 후 비누와 티백 세트를 하나씩 넣어서 정성스럽게 포장하였다.


선물로 비누를 선택한 이유는 비누를 쓸 때마다 여행지에서 느꼈던 기쁨을 되새기길 바랐기 때문이었고 티백을 선택한 이유는 티를 마시면서 가끔이라도 나를 기억해 주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어려운 상황에 그들만 남겨두고 떠나게 되어 미안했다. 나의 선물이 남겨진 이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길 바랐다.

고마운 이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들 (L사의 베이크드알래스카 비누와 낫랩 포장)

즐겁게 저녁을 먹고 헤어지는 길에 준비해 온 선물을 건넸다. 예상치 못한 선물에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집에 돌아가서 선물을 풀어 본 동료들이 손 편지를 읽다가 눈물이 날 뻔했다며 문자를 보냈다.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 좋아하니 준비한 나도 기뻤다.


이제 다음 주에 두 팀만 더 만나면 내가 주최하는 송별회는 끝난다. 혹시 회사에서 송별회를 한다고 해도 핑계를 대고 참석하지 않을 생각이다. 은퇴를 기념하는 자리에서까지 내 인생을 어지럽힌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아서 회사 송별회는 거절할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식당에서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오랫동안 계획했던 나의 송별회이다.


이제 정말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 리스트에서 빠진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면서 아름다운 퇴사를 실행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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