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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페지오 Sep 05. 2022

계절 우울증

며칠 전부터 갑자기 우울한 기분이 밀려왔다. 아 벌써 때가 되었구나 생각하며 마음의 준비를 시작하였다.


나에게는 계절 우울증이 있다.


이 병은 수술을 하고 호르몬 치료 때문에 지독한 우울증을 앓았던 4월이면 어김없이 찾아오고

온 세상이 아름다운 색으로 물드는 가을에도 갑자기 찾아온다.

그리고 동료, 후배들의 승진 소식이 쏟아지는 연말, 연초에도 찾아온다.


이렇게 적어 놓고 보니 일 년 내내 우울증에 시달리는 것 같은데 나의 우울증은 일시적인 것이라 1~2주 정도 지속되다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곤 한다,.


처음으로 병원에 가서 우울증 검사를 받았을 때 의사는 낮고 지속적인 우울이 계속되어 온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서 한참 동안 멍하니 있었다. 회사 일로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일시적으로 우울증이 생긴 거라고 생각했는데 낮고 지속적인 우울이라니, 대체 언제부터 우울증과 함께 했었던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의사는 반드시 약을 먹을 필요는 없지만 혹시 모르니 약을 처방해주겠다고 했다.

 

우울증 약을 받아 들고 집에 돌아와서 해외에 살고 있는 친구들과 영상 통화를 했다. 약을 먹어도 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 친구들의 조언을 듣고 싶었다. 한 친구는 정말 힘들면 약을 먹어보라고 했다. 친구의 딸도 우울증 약을 복용했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했다. 요즘은 우울증 약을 먹는 사람들이 많고 특히 젊은 세대는 우울증 약 처방을 많이 받는다고 했다.


당시 나는 상사와의 관계 때문에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고 가끔씩 숨이 안 쉬어지기까지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정신과 상담을 예약하고 약을 처방받아 온 것이었다. 친구들의 말을 듣고 나니 안심이 되어서 우울증 약봉지를 뜯었는데 왠지 손이 가지 않았다. 회사를 그만 두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우울증 약보다 내게 큰 위안이 된 것은 의사의 한마디였다. 한 시간 반이 넘는 검사를 한 후 의사와 상담을 했는데 의사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진단을 내렸다. "낮고 지속적인 우울이 계속되어 왔으나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당신이 당하고 있는 일이 사실이라면 정신과 상담을 받을 것이 아니라 노무사를 찾아가거나 노동부에 고발을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나지막하지만 확신에 찬 의사의 한 마디가 내가 왜 이렇게 힘들었던 것인지 깨닫게 해 주었다. 그날 이후 죽고 싶다는 생각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정신을 차리고 차근차근 퇴사를 준비했다. 그리고 은퇴를 했다.


은퇴한 후에 평화롭게 잘 지내고 있었는데 가을이 되자 어김없이 우울증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사실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나의 우울이 사라질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정신과 상담을 받은 후 우울증에 관련된 책들을 수없이 읽어보고 분석한 결과 나의 우울증은 여러 가지 것들이 조합해 낸 산물이었기 때문이다.(한때 꿈이 정신과 의사였기에 심리학 책을 수십 권 읽었고 나름대로 나 자신을 분석해보았다.) 며칠 있으면 거짓말처럼 사라질 것을 알기 때문에 예전처럼 힘들지도 않다. 회사를 다닐 때는 겨우 마음을 추슬러서 우울증에서 회복하려고 하면 상사의 폭언이, 동료의 무례함이 다시 나를 쓰러뜨리곤 했다. 이제는 그럴 일이 없으니 우울증에서 훨씬 더 빠르게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이제 낮고 지속적인 우울과 맞서 보려고 한다.

나의 우울증의 맨얼굴을 보면서 안의 어떤 것들이 이런 우울을 만들었는지 찾아보고 치유해보려고 한다. 오래 지속되어 온 만큼 시간이 꽤 걸리겠지만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쓰다듬어 주다 보면 나아질 것을 믿는다.


지인의 소개로 3개월 동안 모닝 페이지라는 것을 하면서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방법을 배웠다. 혹시 지금 너무 힘들고 괴롭다면 모닝 페이지를 써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단, 매일 한 시간 정도 시간을 낼 수 있을 때 시작해야 한다. 삶이 너무 각박하고 힘든데 모닝 페이지를 시작한다면 모닝 페이지가 또 하나의 스트레스가 지도 모른다.


비 오는 월요일, 다시 나를 찾아온 우울과 대화를 시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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