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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페지오 Aug 08. 2022

안하무인 안 대리, 독불장군 최 이사

안 대리는 대학교를 졸업한 후 외국 회사만 지원했다. 영어로 유창하게 회의를 하고 해외 출장을 다니는 커리어 우먼이 그녀가 오랫동안 꿈꾸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외국 회사는 경력 사원을 선호하였고 대학을 갓 졸업한 그녀는 번번이 탈락하였다. 수십 번의 고배를 마셨지만 그녀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그토록 고대하던 외국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그녀가 지원했던 부서는 S사의 제품 마케팅(product marketing) 부서였지만 그녀는 교육 사업부 마케팅 사원으로 채용이 되었다. 그녀의 도전 정신과 의욕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었던 교육 사업부 최 이사가 인사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를 채용한 것이다. 그녀는 교육 사업부가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도 몰랐지만 그토록 꿈꾸던 외국 회사를 갈 수 있다면 부서는 상관없었다.


교육 사업부 마케팅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최 이사는 도전을 즐기는 사람이었고 매번 새로운 시도를 하였기에 그녀는 다양한 업무를 경험해 볼 수 있었다. 


최 이사는 회사에서 최초로 채용한 신입 사원인 그녀를 모두 주시하고 있다며 무언의 압력을 가했지만 그녀는 그러한 압박을 즐겼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공부를 했고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일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다 잘 해내려고 노력했지만 신입 사원을 한 번도 뽑지 않은 회사에는 그녀가 참고할만한 자료나 교육이 전무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녀 혼자 터득해야 했고 배워야 할 것이 산더미 같았다. 교육부에는 최 이사와 그녀 단 둘 뿐이라 그녀에게 상세하게 업무를 가르쳐 줄 사수도 없었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를 해도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전문 용어도 잘 모르고 경험도 없으니 다른 부서와 협업을 할 때마다 무시를 당했다. 안 대리는 주눅이 들어서 회의 내내 아무 말도 못 했고 협업 결과물은 다른 부서에 유리하게 작성되었다. 이렇게 작성된 결과물을 가져갈 때마다 그녀는 최 이사에게 무자비한 질책을 당했다. 최 이사는 교육사업부에 불리한 조항들을 조목조목 따지며 그녀를 몰아세웠다. 당신의 패기와 도전 정신을 믿고 채용했는데 이런 사소한 일 하나 제대로 못하냐며 화를 냈다. 이리처리 치이면서 그녀는 누구보다 강해지기로 마음을 먹었고 회의에서 목소리를 크게 내고 의견을 강력하게 피력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른 부서의 제품, 계약 방식, 수익률까지 상세히 공부했다. 관련 자료를 제시하면서 조목조목 따지니 신입 사원이라고 무시하던 이들도 더 이상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점점 모든 조항이 교육 사업부에 유리한 쪽으로 체결되기 시작했고 최 이사도 흡족해하였다. 아직은 경험과 지식이 부족하기에 그녀의 주장이 틀리는 경우도 많았지만 그녀는 절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한번 굽히고 들어가면 다시 신입 시절로 되돌아갈 것만 같아서 잘못된 것을 알면 더 막무가내로 우겼다. 그녀의 강경한 태도에 어떤 이는 자신의 의견이 옳은 데에도 불구하고 의견을 거두었고 어떤 이는 거친 논쟁을 피하기 위해 내버려 두었다. 남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고 목소리를 크게 내니 모든 업무가 수월해졌다. 동료들은 그녀와 싸우지 않으려고 그녀의 의견을 채택해 주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일했고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입사한 지 2년이 흘렀을 때 교육 사업부의 성장과 함께 그녀도 일취월장하였다. 최 이사는 그녀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여 그녀를 대리로 승진시켰다. 인사부에서는 경력 3~4년은 되어야 대리 승진이 가능하다며 반대했지만 최 이사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최연소 대리가 되었다.


나는 그녀가 대리가 되었을 때 이 회사에 입사했다. 개발자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안정적일 것 같은 교육사업부에 지원했는데 잘못된 선택이었다. 새로운 도전을 좋아하는 최 이사와 막무가내인  대리가 벌여놓은 사업들 때문에 교육사업부는 전쟁터와 다름없었다. 나의 전임자는 지나친 업무량을 못 견디고 퇴사를 했다는데 구덩이를 피하려다가 물에 빠진 격이었다. 다시 또 끝없는 일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어느 날 저녁도 못 먹고 일을 하고 있는데  대리가 다정하게 말을 걸었. 회의 때의 딱딱한 모습은 간데없고 친근하게 언니라고 부르면서 기술적인 내용에 대해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보았다. 신입 사원으로 입사했고 기술적인 부분은 잘 몰라서 어려움이 많다고 털어놓는 그녀의 솔직함에 바쁜 일을 제쳐두고 성심성의껏 답변을 해주었다. 우리 회사 제품이 아닌 A 회사 제품 교육까지 확장하는 것은 무리인 것 같다는 속에 있던 이야기까지 했다. 저돌적인 최 이사 때문에 힘들다며 그녀도 내 의견에 격하게 동감했다. 회사에서 터놓고 이야기를 할 사람이 생겼다는 위안에 그날 밤은 편하게 잠들었다.


다음 날, 신규 사업에 대해 논의하는 회의가 열렸다. 모두 열띤 토론을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A 회사 제품 교육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용기를 내서 현재 진행하고 있는 교육만 운영하는 것도 어려운데 다른 회사 제품 교육까지 확장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적어도  대리는 나를 도와줄 줄 거라 생각하고 용기를 냈는데 싸늘한 시선이 돌아왔고 안 대리가 앞장서서 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제저녁 내가 설명해 준 기술적인 내용을 늘어놓으며 조목조목 나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그녀는 회의에서 나를 공격할 정보가 필요해서 내게 접근했던 것이었다. 그녀에게 베푼 나의 친절이 칼날이 되어 꽂혔다. 나만 빼고 모든 팀원이 신규 사업 추진에 동의했고 나는 한순간에 나태하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제대로 된 신입 사원 교육도 없고 모든 것을 혼자서 배워야 하는 외국 회사에서 그녀가 어떻게 최연소 대리가 되었는지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 후로 나는 안 대리와 업무 이외의 대화는 일절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사적인 대화라는 것이 없었다. 점심시간에 나눈 잡담도, 커피를 마시며 한 이야기도 모두 어딘가에서 이용되거나 최 이사의 귀에 흘러들어 갔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다른 동료들도 그녀를 멀리 하게 되었다. 


그녀는 항상 혼자였지만 외톨이임을 즐기는 것 같았다. 남들보다 빨리 승진했고 높은 처우를 받기 때문에 시기를 받는 것이라 생각했다. 점심시간이면 직원들은 그녀를 남겨두고 나갔고 혼자 남은 그녀는 주로 최 이사와 점심을 같이 먹었다.  대리와 최 이사 단둘이 식사를 하는 횟수가 늘어나자 사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들이 내연 관계이고  대리의 예외적인 승진도 그들의 관계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끄떡하지 않았다. 사실이 아니니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적어도 눈에는 그들은 내연 관계로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교육 사업부에 적응하지 못하고 2년 만에 다른 회사로 이직을 했다. 교육 사업부는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다닐 수 있고 결혼한 여자가 할 수 있는 좋은 분야인데 제 발로 복을 차고 나간다며 최 이사는 내게 저주와 독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 2년 내내 너무 다치고 멍들어서 미련이 하나남아 있지 않았다.


다른 회사를 다니면서 최 이사와  대리가 여전히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최 이사는 상무가 되었고 그녀는 과장이 되었다고 했다. 몇 년이 지나 최 이사가 전무가 되었고  대리는 차장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교육 서비스는 성과를 내기 쉬운 분야는 아닌데 그 어려운 곳에서 계속 새로운 사업을 창출해 내고 성과를 인정받다니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몇 년 후에 최 이사가 다른 회사 교육사업부로 이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몇 달 후에  대리도 최 이사와 같은 회사, 같은 부서로 이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십 년 넘게 같은 회사에 있는 것만도 지겨웠을 텐데 또 같은 회사, 같은 부서로 이직하다니 신기한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얼마 안 있어 대리가 최 이사를 배신하고 제품 마케팅 팀으로 옮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입사 후 몇 개월 만에 교육 사업부를 버리고 다른 팀으로 가버린 안 대리 때문에 최 이사가 노발대발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대리는 원하는 것이 있다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남을 배신할 사람인데 십 년 넘게 함께 그녀와 함께 일한 최 이사가 그것을 몰랐다니 의아했다.


그렇게 대리와 최 이사의 오랜 동행은 끝이 났다.

나는 그녀가 최 이사가 없는 곳에서 잘 지내고 있을지 궁금하다. 안하무인이었던 그녀가 그토록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최 이사의 전폭적인 지지 때문이었다. 독불장군 최 이사의 장단을 맞춰줄 수 있는 사람은 안하무인 안 대리뿐이었고 안 대리 또한 최 이사 없이는 회사에서 자리를 잡기가 어려웠기에 이 둘은 십여 년 넘게 공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겨우 2년 남짓 함께 일했지만 최 이사와 안 대리는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유형의 사람들이었다. 

최 이사는 도전 의식을 빌미로 직원들을 한계치까지 몰아붙여서 최대의 성과를 끌어냈다. 그는 팀원들끼리 치열하게 경쟁하게 만들었고 다른 사람들을 밞고 올라가는 분위기를 조장하였다. 교육 사업부 회의는 고성이 난발했고 모든 책임을 떠 앉는 희생자가 나오곤 했다. 최 이사의 눈 밖에 나거나 궁지에 몰리지 않으려면 다른 동료를 공격해야 했다. 신입 사원 때부터 이런 환경에서 일을 베운 안 대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남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안하무인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틀리거나 실패했을 때도 절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십 년 넘게 동거 동락하다가 결별한 그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부디 최 이사는 또 다른 안 대리를 만들어내고, 안 대리는 또 다른 최 이사를 찾아내어 선한 이들을 괴롭히고 있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포클레인이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을 난생처음 보았다. 바다 위에서 흙을 퍼 나르고 있는 포클레인이 불가능은 없다고 밀어붙이던 안 대리와 최 이사를 떠올리게 했다

안 대리 유형의 또라이 대처법

안 대리 같은 유형의 또라이는 공개석상에서 한번 밟아줘야 한다. 그가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할 때 타이밍을 잘 잡아서 조목조목 반박을 하고 면박을 주어야 한다. 단, 당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철두철미한 논리와 증빙 자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준비 없이 덤볐다가는 오히려 당신이 망신을 당할 수 있다. 공개석상에서 한번 호되게 당하고 나면 그는 다시는 기어오르지 않을 것이다.


최 이사 유형의 또라이 대처법

최 이사 같은 유형의 또라이가 당신의 상사라면 나는 이직을 권유하고 싶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으로 소통이 불가능하다.  마음에 드는 부하 직원은 끝까지 책임져주고 끌어주기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눈에 들기는 쉽지 않다.





이 글은 실화에 기초해서 작성된 에피소드이지만 오로지 제 기억을 바탕으로 재건되었고 이야기의 흐름을 위해 각색된 부분도 있기에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에피소드에 사용된 성은 안하무인과 독불장군에서 연상되는 이름을 사용했고 실명과는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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