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전 전무님으로부터 급한 전화를 받았다. 급한 문제가 생겼으니 D 고객사로 지금 당장 와달라고 하셨다.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물어볼 상황이 아닌 것 같아서 고객사로 바로 달려갔다.
일요일 오전인데도 불구하고 고객사 회의실에는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다음 달에 오픈 예정인 차세대 프로젝트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해서 긴급 소집된 회의라고 했다. 차세대 프로젝트는 고객사에서 대규모 예산을 투자하여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프로젝트로 우리 회사의 컨설턴트 한 명도 파견되어 있었다. 프리세일즈인 나는 프로젝트에는 관여하지 않았기에 도무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숨을 돌리고 보니 담당 컨설턴트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회의 중에는 도저히 물어볼 상황이 아니었다.
고객사 상황은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수십 명의 개발자들이 구축한 시스템이 완료되어 오픈 한 달 전에 성능 테스트를 했는데 테스트를 시작하자마자 서버가 다운되었다고 했다. 서버가 다운되는 원인을 찾아야 하는데 이것이 코딩 상의 문제인지 우리 회사 소프트웨어의 문제인지 아니면 DB 설계의 문제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고객사에서 관련자 모두를 호출한 것이었다. 수십 억을 투자한 대형 프로젝트라 고객사 부장님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빠른 시일 내에 문제의 원인을 밝혀내야 하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관계사는 모두 상주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래도 이성의 끈을 잡고 있던 고객사 팀장 한분이 고성이 오가는 회의를 잠깐 중단하고 10분 간 휴식 시간을 갖자고 하셔서 겨우 전무님께 궁금하던 것을 물어볼 수 있었다. 프로젝트에 파견 나간 O 컨설턴트가 아닌 저를 호출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더니 O 컨설턴트는 갑자기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셨다. 아픈 사람을 불러낼 수 없으니 코드 분석 및 제품에 대한 분석을 내가 해야 한다고 하셨다.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은 소리였다. 몇 개월 동안 기술 자문도 하고 개발에도 같이 참여한 컨설턴트의 도움도 없이 프로젝트의 문제점을 알아내야 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나는 프리세일즈라서 소프트웨어 납품이 확정된 후에는 고객사 프로젝트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게다가 개발직을 그만 둔지 십 년도 넘어서 이러한 대형 프로젝트의 코드를 분석하고 문제점을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상황 파악도 안 되고 당장 할 수 있는 것도 없어서 일요일 내내 고객사로부터 욕만 먹다가 어두워진 다음에야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월요일에 다시 고객사로 출근해야 한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 뒤척였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매일 고객사로 출근하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프로젝트에 관련된 총 5개 회사의 직원들이 한 회의실에 상주해 있었는데 우리 모두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회사로 돌아갈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개발 경험이 별로 없고 대형 프로젝트를 처음으로 수주했던 개발사는 자신들의 코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우리 회사 제품이 문제라고 책임을 떠밀었다. 개발사의 코드는 파견되었던 우리 회사 컨설턴트가 전부 리뷰했고 기술적인 자문도 했기 때문에 문제가 있더라도 우리 회사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프로젝트 세부 내용을 알지 못하는 우리는 모든 책임을 떠 앉았고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본사에 보고서를 보냈다.
서버가 다운되는 원인을 파악해야 했지만 O 컨설턴트의 전화기는 꺼져있었고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곳은 미국 본사뿐이었다. 시차 때문에 미국은 주말이라서 당장 연락이 되는 엔지니어나 개발자가 없었고 답변을 받으려면 월요일 저녁까지 기다려야 했다.
월요일 내내 지옥 같은 시간이 계속되었다. 고객사 부장에게 불려 가서 욕을 먹고, 이사에게 욕을 먹고 상무에게도 욕을 먹었다. 당장 해결해 내라고 소리소리 지르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엇이 죄송한지도 모르면서 그저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월요일 저녁 늦게 겨우 풀려나서 대책 회의를 하러 사무실로 갔다. 하루 종일 내가 욕을 먹는 동안 본사 엔지니어링 팀에서 답변이 와 있었다. 엔지니어링 팀에서는 우리 회사 제품은 동시 접속자가 많고 부하가 몰리는 금융사 프로젝트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했다. 부적절한 프로젝트에 회사 제품을 제안한 것에 대한 질책도 이어졌다. 이러한 기본적인 기술 리뷰는 전무님과 컨설턴트가 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정말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머리를 짜 내도 우리 회사 문제인 것이 분명했고 제품을 판매하고 고액의 컨설팅 비용까지 받은 우리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다들 한숨만 쉬다가 아무런 대책 없이 자정 즈음 퇴근을 했다.
다음 날 본사에서 받은 답변을 전달하기 위해 전무님과 함께 고객사로 향했다. 수십 명의 관계자들이 우리만 쳐다보고 있었고 우리는 우리 제품의 문제라는 임을 실토해야만 했다. 당연히 전무님이 말씀하실 거라 생각하고 가만히 기다렸다. 그런데 전무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5분이 넘는 숨 막힌 정적을 못 견디지 못하고 본사에서 받은 답변을 그대로 전달했다.
그때부터 모든 비난은 내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당장 오픈이 한 달 남았는데 어떻게 해결할 거냐는 질책부터, 막말과 고성까지 오가면서 순식간에 회의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무런 해결책이 없었기에 그냥 욕을 먹다가 회의실에서 나왔다.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고객사를 떠나지 말라는 지시에 고객사 사무실 한 구석에 죄인처럼 앉아 있었다.
그 후로 열흘 동안 나는 고객사에 볼모로 잡혀 있었다. 고객사는 분풀이를 할 대상이 필요했고 나는 분풀이 대상으로 선출된 것이다. 점심과 저녁 식사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고객사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가야 했기에 건물 1층의 설렁탕 집에서 매끼를 해결했다. 이 사건 이후로 난 설렁탕을 먹지 못한다. 설렁탕만 먹으면 그때 먹은 욕이 다시 튀어나올 것만 같고 속이 울렁거린다.
고객사에 볼모로 잡힌 지 열흘 정도 지나니 그들의 화도 조금 누그러졌다. 반년 넘게 진행한 프로젝트라 뒤엎을 수도 없었다. 찬찬히 들여다보니 프로젝트 경험이 없었던 개발사 잘못들도 눈에 띄었고 본사에 코드를 보내서 수정하고 나니 예전보다 훨씬 매끄럽게 구동되었다. DB 튜닝을 해서 서버 부하를 줄였고 우리 회사는 제품 라이선스를 추가로 무상으로 지원하여 부하가 분산될 수 있도록 조치했다.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굴러갈 수 있을 정도로 코드가 고쳐진 후에야 나는 회사로 돌아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2주 만에 회사에 출근해서 이메일을 보다가 O 컨설턴트가 나온 기사를 보게 되었다. 지난주 개발자 콘퍼런스에서 그가 발표를 했다는 기사였다. 이 시기는 내가 고객사에 볼모로 잡혀있었고 그는 병원에 입원해 있던 때였다. 기사를 보고 놀라서 동료에게 보여줬다. 병문안을 다녀온 동료가 O 컨설턴트가 입원한 병원이 한방병원이라고 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는 문제가 발생할 것을 알고서 병원으로 도망간 것이었다. 개발에 같이 참여하고 코드 리뷰까지 했기에 프로젝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가 없으니 도피를 선택했던 것이었다. 그 와중에 콘퍼런스에서 발표까지 하다니 배신감과 분노에 온몸이 떨렸다.
그의 사진까지 나온 기사를 프린트해서 전무님 방으로 달려갔다. 한방병원에 입원했다는데 진짜 아픈 것은 맞는지, 병가를 내고 외부 콘퍼런스에서 발표하고 다니는 것을 알고 계셨냐고 따졌다. 알아보겠다는 말씀을 듣고 전무님 방에서 나왔는데 내 얼굴보다 더 하얗게 질린 전무님 얼굴을 보니 그도 모르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보름 동안 내가 당했던 일들이 떠올라서 잠이 오지 않았다. 동료가 과로로 쓰려졌다는 말에 남의 잘못을 떠안고 온갖 욕을 대신 먹었는데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시간이 흘러 병가를 냈던 컨설턴트는 회사로 복귀하였지만 회사에서는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 O 컨설턴트는 아무런 해명 없이 회사 생활을 계속했고 나를 슬슬 피해 다녔다. 분한 마음에 그에게 그리고 전무님께 따졌지만 아무도 제대로 된 해명을 내놓지 못했다.
십 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회사에서 O 컨설턴트에게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어떻게 본인의 잘못을 남에게 떠밀고 한방병원으로 도망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와중에 외부 콘퍼런스에서 발표까지 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O 컨설턴트가 그만두고 몇 년이 지난 후 동료들에게 이 에피소드를 말해줬더니 아무도 믿지 않았다. 다들 설마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직접 당하고 겪은 일인데 그럴 리가 없다는 동료들의 말이 서운해서 사건에 대해 상세하게 이야기를 해줬다. 한 사람이 가끔 O 컨설턴트를 만난다고 하길래 해명을 듣고 와서 전해달라고 했지만 나의 동료는 차마 이야기도 꺼내지 못했다고 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아직도 응어리가 남아 있어서 변명이라도 듣고 싶다. 혹시 그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는지, 그런 짓을 하고도 어떻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을 수 있었는지 해명을 듣고 싶다.
회사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회사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얼마나 더 배워야 이런 일을 당하지 않을지, 얼마나 더 수련해야 다치지 않고 회사 생활을 할 수 있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