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인 공고를 보면 삼십 대를 대상으로 하는 공고가 가장 많다. 아마도 회사에서는 실무에 바로 투입할 수 있고 몸값도 과하지 않은 과차장급 직원을 선호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시기는 개인의 회사 만족도도 높은 편인데 나의 경우에도 삼십 대에 가장 열심히 일했고 회사에 대한 만족도도 높았던 것 같다.
삼십 대 중반, 경력 십 년 차쯤 되었을 때 나의 커리어는 격변기를 겪었다. 엔터프라이즈 서버 프리세일즈로 정착해서 잘 일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전자 문서 솔루션과 3D 제품 프리세일즈로 업무가 변경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개발자, 강사, 엔터프라이즈 서버 프리세일즈는 기술적으로는 연결되는 맥락이 있었다. 모든 기반 기술이 자바였기에 제품도 금방 배울 수 있었고 업무에도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전자문서와 3D라니, 하루아침에 전혀 해보지도 않은 제품과 분야를 담당하라고 하니 청천벽력이었다. 일을 잘해서 새로운 업무를 맡긴 것이라는 지사장의 설명은 고깝게 들렸다. 당시 우리 팀에는 지사장이 눈에 띄게 총애하는 직원이 한 명 있었다. 그에게 엔터프라이즈 제품을 몰아주려고 내게 생뚱맞은 제품을 맡기는 것이라 생각되었지만 윗선의 지시이니 불복할 수도 없었다.
5년 여의 프리세일즈 경력이 쌓여서 이제 겨우 일이 할만했는데 다시 힘겨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조선, 항공, 제조 등의 중공업 고객사가 대부분이라 대한민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녀야 했다. 담당해보지 않은 인더스트리라 처음부터 하나씩 공부해야 했다. 이렇게 갑자기 중공업 인더스트리를 담당하게 되면서 특이한 경험을 많이 했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소개하려고 한다.
부산에서 헬기를 타고 거제도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아는가?
요즘은 교통이 좋아져서 휴가차 거제도에 가는 사람들도 많다고 들었다. 그러나 내가 중공업 인더스트리를 담당했던 시절의 거제도는 접근성이 좋은 도시는 아니었다. 요즘처럼 도로가 잘 뚫려있지 않아서 편도로만 꼬박 6시간이 넘게 걸렸기에 당일 출장은 불가능한 곳이었다. 그런데 2007년 어느 날, 고객사로부터 다급한 호출을 받았다.
다음날 예정되어 있는 행사에서 우리 회사 제품 세미나를 해달라고 하면서 오전 10시까지 거제도로 오라고 했다. 아마도 예정되었던 세션이 취소돼서 급하게 연락한 것 같았는데 중요한 고객사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고객사 담당자는 시간이 빠듯하니 새벽에 부산 공항으로 와서 헬기를 타고 거제도로 들어오라고 했다. 버스나 자동차를 타면 부산에서 거제도까지 한 시간 넘게 걸리지만 헬기를 타면 15분 내에 올 수 있어서 새벽 비행기를 타고 오면 거제도에 오전 10시까지 도착할 수 있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요청으로 준비할 것도 많아서 이런저런 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고 준비를 마치고 새벽같이 집을 나섰다. 그리고 새벽 비행기를 타고 부산 공항에 내려서 고객사에서 제공한 헬기를 탔다.
겨우 3~4명의 승객을 태울 수 있는 정도로 작은 헬기는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채 굉음을 울리며 수직으로 날아올랐다. 얄팍하고 애처롭기까지 한 헬기는 무시무시한 상공의 기류를 그대로 흡수했다. 마치 맨몸으로 하늘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강한 기류를 그대로 받아내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러다가 죽는 건 아닌지 그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 예고도 없이 헬기가 착륙했다. 친절하게 안내 방송을 해주고 부드럽게 이착륙을 하는 비행기가 얼마나 안전한 교통수단인지 그제야 깨달았다.
고객사에서는 임원들만 사용하는 헬기에 어렵게 자리를 내어주었다며 생색을 내었지만 나는 그 십여분 간의 공포를 오래도록 잊을 수 없었다. 대체 임원들은 이 무서운 헬기를 어떻게 타는지, 임원 정도 되면 생명을 걸고 일하는 것인지, 미동도 없이 내 옆에 앉아계셨던 임원분은 정말 이 헬기가 무섭지 않은 건가 등등 오만가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헬기를 탄 십 여분 내내 공포에 질러 눈을 질끈 감고 있었는데 용기를 내어 아주 잠깐 동안 거제도를 바라보았다. 극도의 공포를 느끼고 있었는데도 하늘에서 바라본 거제도는 참으로 아름답고 기이했다. 마치 선으로 갈라놓은 것처럼 거주 지역과 공장 지역으로 나뉘어 있는 거제도라는 섬은 기묘하게 아름다웠다.
헬기에서 내린 후 애써 정신을 차리고 택시를 타고 고객사로 향했는데 이번에는 회사 안을 누비고 다니는 수 백대의 오토바이와 스쿠터의 굉음에 놀라 입이 쩍 벌어졌다. 내 모습을 본 택시 운전사께서 빙그레 웃으며 설명을 해주셨는데 거제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오토바이, 스쿠터,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고 사업장 내에서 이동할 때도 이륜차를 사용한다고 하셨다. 대한민국에서 이륜차(오토바이)가 가장 많이 등록된 곳이 거제시라는 것까지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난생처음 타 본 무서운 헬기 때문에 놀라고 수백 대의 오토바이 부대에 놀랐지만 세미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서둘러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무사히 강연을 마쳤다. 돌아갈 때도 헬기를 제공해 준다고 했지만 정중히 사양하고 시외버스를 타고 어둑어둑해진 뒤에야 집에 돌아왔다.
겨우 두 시간의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새벽 다섯 시에 집을 나서서 헬기를 타고 거제도에 갔던 그날의 기억은 강렬했다. 중공업을 담당하게 된 후에 언젠가 거제도를 가게 될 거라고 동료들이 겁을 주곤 했는데 동료들 중에도 헬기를 타고 거제도에 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동료들은 신고식을 제대로 했다며 오히려 나를 부러워했다.
삼십 대의 나는 열정에 가득 차 있었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러한 패기와 열정으로 중공업이라는 전혀 새로운 업계, 전자문서와 3D를 맡으라는 난관도 몇 개월 만에 정복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갑작스러운 업무 변경은 나를 내보내려고 했던 지사장의 조치였던 듯하다. 대학 선후배를 하나둘씩 불러들여 전 직원의 1/3을 동문으로 채우고 회사를 동문회로 만들어버렸던 지사장은 여직원을 유독 싫어했다. 꼰대 사장은 그 후로도 계속 나를 괴롭혔지만 나보다 훨씬 먼저 회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