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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코엑스가 그립다.

by 아르페지오

은퇴 날짜를 정해놓고 회사 생활을 하니 지난 세월을 돌아보게 된다. 오늘은 케케묵은 하드디스크를 꺼내서 예전 기록들과 사진들을 찾아보았다. 이십 년 넘게 쌓인 사진들이 새록새록 기억을 되살려주었다.


프리세일즈를 하면서 큰 규모의 콘퍼런스를 많이 했다. 경희대 평화의 전당, 세빛섬 콘퍼런스홀, 청담동 드레스 가든, Yes24 라이브홀 등 다양한 장소에서 강연을 했는데 몇 년 전까지도 우리의 단골 행사장은 코엑스 그랜드볼륨이었다. 당시에는 몇 천명을 모을 수 있는 장소가 그리 많지 않았고 교통이나 여러 가지 조건을 따졌을 때 코엑스만 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요 타깃층인 IT 회사들이 강남에 있어서 접근성도 좋았다.


그 당시 코엑스에서 행사를 하려는 기업이 많았기 때문에 콘퍼런스룸은 1년 365일 예약이 꽉 차 있었다. 장소 대관은 마케팅에서 하는 것이라 자세히는 모르지만 코엑스 행사장을 원하는 날짜에 예약하는 것이 하늘에 별 따기만큼 어려웠다고 한다. 콘퍼런스 준비를 여유 있게 하려면 이틀 대관을 해야 하지만 항상 예약이 꽉 차 있으니 행사장은 겨우 하루 동안만 사용할 수 있었다. 다른 회사의 콘퍼런스가 끝나고 그들이 철수한 저녁때부터 다음 날 저녁때까지 겨우 24시간 동안만 콘퍼런스룸을 사용할 수 있었다.


콘퍼런스 준비 단계는 다음과 같다.


먼저 무대 장치 및 네트워크 장비 등의 필요한 시스템을 설치한다. 콘퍼런스를 하려면 프로젝터, 음향, 조명 등 세팅해야 할 장비들이 많은데 이러한 일들은 수많은 스태프들이 일사불란하게 진행한다. 회사 로고나 제품 이미지로 디자인된 배너 및 포스터로 무대와 콘퍼런스 룸을 꾸미는 작업도 이때 같이 병행한다.


이러한 세팅 작업이 끝나고 나면 발표자 리허설을 진행한다. 발표자가 강연을 하면서 제품 시연을 해보고 마이크 테스트도 해보는 단계인데 이러한 발표자 리허설은 밤늦게서야 할 수 있다. 보통 밤 9시, 10시가 넘어서 시작하고 세팅 작업이 지연된 경우에는 자정이 넘어서 시작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나는 자정 무렵의 코엑스에 익숙하다. 모든 식당과 상점의 영업이 끝나고 콘퍼런스 스태프들과 발표자들만 남아 있는 코엑스는 북적북적한 한낮의 코엑스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밤샘 작업에 지쳐 행사장 바닥에 웅크리고 잠을 자고 있는 대행사 직원들, 텅 빈 행사장에서 리허설을 하고 마이크 테스트를 하는 발표자들, 내일 행사를 완벽하게 치르기 위해 모든 것들을 체크하며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는 마케팅 담당자가 있는 그곳에서 나는 수없이 밤을 지새웠다. 학창 시절 체력이 약해서 밤을 새우지 못했는데 직장인이 되어서 먹고살기 위해 반복되는 밤샘 작업에 익숙해져 갔다.

대규모 콘퍼런스를 할 때마다 겨우 두세 시간 눈을 붙이고 강연을 했는데 그 시절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일했던 걸까? 발표자들은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까 봐 시스템 체크와 리허설을 수십 번 반복한 후에야 집으로 돌아갔고 마케팅 담당자는 발표자들이 집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이것저것을 체크하다가 행사장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다. 어떤 날은 참석자들이 입장할 때까지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어서 다 같이 발을 동동 구르며 행사장에서 24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뒤돌아보니 그때가 가장 그리운 이유는 가장 열정이 넘쳤던 시기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아쉬움이 남아서일까?


오랜만에 코엑스에 가보니 우리들만 아는 코엑스의 비밀 통로(모든 상점이 문을 닫고 정문도 폐쇄되기 때문에 외부로 나가려면 비밀 통로로 다녀야 했다.), 새벽에 일찍 문을 열어서 카페인이 필요했던 우리에게 구세주 같았던 일리 카페 등 추억이 담긴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 이제 나도 이 역사 속에서 사라져야 하는데 아쉬움이 남는다.


아직 나의 일을 잘할 수 있는데 그리고 프리세일즈라는 나의 직업을 사랑하는데 제 발로 걸어 나가야 하는 내 처지가 서글프다. 수년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은퇴를 결심하였는데 막상 은퇴 날짜를 정해놓고 나니 눈에 밟히는 것들이 있다. 오늘 갑자기 코엑스 그랜드볼륨이 생각난 것은 아쉬움 때문인 것 같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만두는 것이 통쾌하고 시원한 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이 최선이라 생각한다.

이만큼 노력했으면 할 만큼 됐다고 나 자신을 다독거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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