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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처럼 지고 싶지 않다.

by 아르페지오

창 밖에 보이는 목련꽃이 시들어 간다.

운이 좋게도 집 앞에 큰 목련 나무가 있어서 봄이 오면 목련 꽃을 실컷 볼 수 있다. 목련 꽃이 활짝 피면 우리 집 창가는 정말 아름답다. 속상한 일이 있거나 답답한 일이 있으면 커피 한잔을 내려서 창 밖의 목련 꽃을 바라보곤 한다. 아름답고 우아한 수십 송이의 목련 꽃을 보고 있으면 답답한 마음도 풀어지고 기분도 나아진다.


목련의 꽃말이 고귀함, 숭고함이라는데 갓 피어나기 시작할 때부터 활짝 피었을 때까지의 목련은 기품을 자랑한다. 그런데 목련꽃은 유난히 수명이 짧다. 활짝 피어난 목련꽃은 겨우 며칠 아름다움을 뽐내고 금세 누렇게 색이 변해가면서 처참하게 시들어간다.


해마다 집 앞의 목련 나무를 지켜보았는데 나이 오십이 되니 목련꽃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목련꽃처럼 지고 싶지 않다. 우아하고 아름답게 천천히 나이 들고 싶다.'


꽃을 피우기 위해 겨우내 추위를 견디며 피나는 노력을 했을 텐데 저렇게 며칠 꽃을 피우고 처참하게 지는 목련 꽃을 보면 서글프다. 사람의 생도 그러하다면 너무 허무할 듯하다.


직장인으로서 물러날 때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간혹 시들어가는 목련 꽃처럼 버티고 있는 선배들의 모습들을 보면 안타까웠다. 해마다 처참하게 시들어가는 목련꽃을 보면서 나에게 다짐했다. 회사에서 저런 존재가 되기 전에 아름답게 내려오자. 나만의 퇴사일을 정해 놓고 추한 모습을 보이 전에 내려오자고 마음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었다.


어쩌면 나는 운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이러니하게도 시니어가 된 이후부터 열심히 일해도 보상을 받지 못했고 승진에서 매번 누락되었다. 도와주는 이 없이 홀로 고전 분투하면서 어렵게 어렵게 능력을 증명해내면 상사가 잘리거나 조직이 변경되었다. 5년 동안 상사가 3번이나 교체되었으니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다. 상사가 바뀔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자꾸만 이런 일이 반복되니 버틸 힘이 바닥이 났다. 남자 동료들은 서로 끌어주고 도와주며 잘 버티고 있는데 나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어떻게든 무리에 끼어보려 했지만 그들만의 서클로 들어가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학연, 지연, 혈연 그 모든 것들이 얼키설키 설킨 끈끈한 형님 아우 사이에는 도무지 끼어들 구석이 없었다.


어쩌면 나의 직장 생활은 성공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직장 생활이 맞지 않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25년 직장 생활을 부끄럽지 않게 기억할 수 있을 때 내려올 수 있어서 행이다.


은퇴라는 단어가 멀게만 느껴지던 십여 년 전, 미국 출장을 갔다가 우연히 동료의 은퇴식을 보게 된 후로 아름다운 은퇴를 꿈꾸었다. 65세에 은퇴하는 프리세일즈 엔지니어가 전 세계에서 모인 동료들의 축하를 받으며 은발을 휘날리며 퇴장하는 모습이라니. 나도 저렇게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 멋지게 은퇴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느덧 그 시간이 다가와버렸다.


오랫동안 고심해서 정한 은퇴 날짜는 올해 가을, 입사 20주년 기념일이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회사 입사 20주년을 기념하면서 직장생활을 마무리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입사 기념일을 은퇴 날짜를 정했다.


가을이 오면 목련 나무에 단풍이 예쁘게 들 것이다.

아름다운 단풍을 보면서 나도 인생 2막을 시작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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