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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일 년

by 아르페지오

2021년 12월, 20년 넘게 다닌 회사를 퇴사했고 총 25년의 직장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철저하게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20년 만의 퇴사는 쉽지 않았다. 예상치 못했던 감정의 무너짐에 일상생활이 어려웠다. 이 복잡한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집에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무작정 제주도로 떠났다.


제주도에 여행을 온 것은 거의 20년 만이었고 겨울의 제주도는 난생처음이었다.

따뜻한 날씨, 야자수 나무와 활짝 핀 꽃들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멀리 어딘가로 날아온 것 같은 기분에 감정의 무게와 현실의 고민은 날아가버렸다. 푹 쉬면서 그동안 고생했던 나 자신을 다독여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여행을 다녀오고 나니 마음이 진정되었다.

이국적인 제주도 풍경


여행을 다녀온 이후에는 평화로운 일상을 찾았다. 그러나 나의 하루는 매일매일 새롭다. 은퇴한 지 거의 일 년이 되어가지만 아직도 매일 새로움과 마주한다. 그러나 이 새로움은 나의 일상을 뒤흔드는 자극이 아니고 하루하루를 고대하게 만드는 기대와 설렘이다.


분명 같은 장소에 있는데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


우리 집 바로 앞에 작고 예쁜 카페가 있다는 것을 십 년 만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아파트 단지 안에 숨어 있는 아담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았다. 대체 얼마나 바쁘게 살았길래, 얼마나 여유가 없었길래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 것들도 보지 못하고 살았을까.


정리를 하다가 구석에 처박혀 있는 화장품을 하나 발견했다. 회사에서 너무 속상한 일이 있던 날, 나를 위로한답시고 평소엔 엄두도 못 내던 고가의 제품을 샀는데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나도록 방치되어 유통기한도 지난 것을 보니 과소비는 내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나 보다.


이불장을 정리하다가 비숫한 겨울 이불이 두 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피식 웃었다.

두꺼운 이불을 사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언젠가 사서 이불장에 넣어놓고는 비슷한 걸 또 샀나 보다. 어떻게 저렇게 비슷한 이불을 채 샀는지 나의 일관적인 취향에 실소를 하고 말았다.


동네 사람들 얼굴도 보이기 시작했다.

십 년 넘게 같은 집에 살았는데 매일 바쁘게 동동거리느라 이웃들 얼굴을 볼 여유가 없었다. 가끔씩 만날 때마다 우리 아들 안부를 묻고, 내게 인사를 하는 이웃들을 보면서 그들은 나를 어떻게 아는지, 어떻게 내 아들의 나이까지 기억하는지 궁금했는데 이제야 나도 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8층 노부부, 10층 아기 엄마, 13층 중년부부, 매일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이웃 얼굴을 못 알아보았던 내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동안 해보지 못했던 것들도 하나씩 해보고 있다.

평일 오전에 가보고 싶었던 카페에도 가보고 동네 소모임에 참석해서 나무 이름, 풀이름, 꽃 이름도 배운다.

클래식 기타도 다시 시작했다. 조만간 피아노도 연습해서 나의 기타 연주와 피아노 연주를 디지털로 조합해보려는 꿈도 생겼다.


돈도 중요하고 자아실현도 중요하지만 직장을 다녔던 25년 동안 나는 자신을 너무 돌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앞만 보고 가느라 나 자신을 잊고 살았다.




나는 나의 직업을 사랑하지만 은퇴를 했다.

나의 일을 사랑하고 잘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 발로 걸어 나가게 만든 조직, 사람, 회사에 대한 분노는 손글씨로 빽빽하게 노트에 적어서 마음속에서 덜어내었다.


나이 오십이면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고 하던데 인생 2막을 시작하기에도 적당한 나이인 것 같다.


이제는

나 자신을 돌보고

나를 위해 시간을 쓰면서

더 이상 다치지 않고

더 이상 상처받지 않고 살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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