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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표를 냈다

by 아르페지오

결국 사표를 냈다.


퇴사를 결심한 것은 2020년 가을이었다.

1년만 더 버티면 입사 20주년이 되고 직장생활을 한 지 25년이 되니 그때까지만 버터 보기로 하고 힘든 시간을 견뎠다.

그런데 막상 20주년 기념일이 다가오고 사표를 내려고 하니 마음이 요동쳤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내가 나가야 하는지, 그만두라고 하는 사람도 없는데 일 년만 더 버텨보면 어떨지, 오만가지 생각들이 나를 흔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20주년 기념일에 사표를 냈다.


그런데 퇴사일이 다가올수록 자꾸만 화가 난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내가 왜"하는 마음이 평온한 나의 마음을 들쑤신다.

몇 년째 하는 일 없이 놀면서 착한 사람들을 갉아먹는 빌런들은 처단하지 못하고,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남의 일만 헤집고 다니는 악당들도 처단하지 못하면서 애꿎은 나만 괴롭힌 직장 상사에게 분노가 치민다.

도와달라고 애타게 손을 내밀었는데 잡아주지 않는 지사장님에게도 화가 난다.

겨우 이 정도 스트레스도 견디지 못하고 백기를 들고나가는 나 자신에게는 짜증이 난다.


수년간 지속된 부당함과 억울함이 쌓이고 쌓여서 내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겼다.

밖에서 볼 때는 일하고 싶은 기업에 꼽히는 좋은 회사인데 조직 내부는 곪을 데로 곪아 터져 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는 상태인데 나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결국 사람이 바뀌어야 이 모든 것들이 개선될 텐데 회사를 곪아 터지게 만든 인간들은 절대 회사를 그만 둘 생각이 없고 회사도 그들을 내보낼 방법이 없다.

그들이 초래한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과연 누군가는 주시를 하였고 조치를 하려 했을까?

어떤 지사장은 알고 있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했고 어떤 지사장은 모르는 척 외면하려 했었다.

내가 보기엔 그들 모두 변명만 늘어놓았던 것 같다.


어찌 되었던 이 모든 부당함과 억울함의 지옥에서 해방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한 달 남은 퇴사일까지 시간이 너무 더디게 가지만 이 또한 지나가겠지.


별 것 아닌 것 같은 이 한 문장이 힘든 시간 내내 나를 버티게 해 주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 말을 반복해서 되뇌면서 20년을 채울 수 있었다.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집 앞에 핀 목련꽃을 보면서 힘든 봄을 견뎌냈다.

목련 나무에 단풍이 예쁘게 들면 모든 것이 끝날 거라 생각하고 모진 날들을 버텼는데 나는 아직도 퇴사를 하지 못하였다. 엊그제의 매서운 비바람을 견딘 단풍잎들이 창가를 아름답게 밝혀주고 있는데 저 잎들이 다 떨어져야 이 질긴 인연이 끝날 것 같다.

우리 집 창가에서 본 목련꽃(봄)과 단풍(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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