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아프면 휴가를 내는 것이 당연하지만 직장인에게 있어서 이 원칙은 생각보다 실행하기 어렵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 휴가를 내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내 경우에는 프리세일즈라는 직업 특성 때문에 그러했다.
프리세일즈는 고객 지원 부서이다. 프리세일즈의 주요 업무는 구매 전 단계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기술 문의에 응대해서 구매가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세일즈(구매) 전에 필요한 프리 세일즈를 하는 것이고 영업 사원이 담당하는 구매 프로세스를 제외한 제외한 모든 기술적인 업무를 수행한다. 고객사에 가서 제품 시연을 하거나 제안서를 쓰고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것이 주요 업무인데 이러한 일정은 대부분 고객사에 의해 결정된다. 대부분의 일정이 고객사에 의해 정해지기 때문에 프리세일즈가 자신의 일정을 제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고객과의 약속이 있는데 갑자기 아프다고 휴가를 낼 수도 없고 특히 큰 규모의 세미나가 예정되어 있을 경우에는 병가를 낼 수 없다. 물론 큰 회사라면 대체 인력이 있겠지만 우리 회사 같이 작은 규모의 지사에는 내가 아프면 나를 대신해 줄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나도 사람인지라 이십 년 넘게 프리세일즈로 일하면서 여러 가지 난관이 있었는데 어떻게 대처했는지 한번 적어보려고 한다.
가장 기억나는 것은 4~5년 전에 했던 고객사 세미나이다. 고객사에서 200명 정도의 임직원이 참석하기로 한 제품 설명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당시 이 회사는 우리 회사의 소프트웨어를 전사 도입 할 예정이었고 수억 원 예산을 집행하려면 실무자들의 의견이 중요했기 때문에 세미나가 매우 중요했다. 세미나에서 제품 기능을 보여준 후 실무자들의 피드백을 받아서 전사 도입을 추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세미나라서 신경도 많이 쓰고 준비를 많이 했는데 하필 세미나 전날 독감에 걸러버렸다. 갑자기 열이 39도를 오르락내리락하고 몸살 기운까지 있으니 다음날 오후에 예정되어 있는 세미나를 할 수 있을지 눈앞이 깜깜했다. 세미나 날짜는 한 달 전에 정해진 것이었고 임직원 200명 정도가 모일 수 있는 다른 날짜를 찾기 어려우니 일정을 연기할 수도 없었다. 옆에서 딱한 사정을 지켜보던 남편이 반차를 내고 나를 고객사에 데려다줬을 정도이니 내 몸 상태가 얼마나 안 좋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럴 때마다 사용하는 나만의 응급 처방이 있다. 병원에 가서 수액을 맞는 것이다. 오전에 병원에 가서 수액을 맞은 후 세미나 시간에 맞춰서 고객사로 향했다. 링거를 맞은 덕분에 열이 내려서 두 시간짜리 세미나를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고객사 주차장에서 두 시간 넘게 기다려 준 남편 덕분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생각해 보면 약 기운과 고열에 시달리면서 어떻게 두 시간 강연을 마쳤는지는 잘 모르겠다. 기침 때문에 목도 쉰 상태였는 데 있는 힘을 다 짜내서 프레젠테이션과 제품 시연을 했고 돌아와서 2~3일 내내 앓아누웠던 것 같다.
세미나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고객사는 우리 회사 제품을 전사 도입하였고 전 세계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는 큰 매출이라 본사에서 상도 받았다. 본사에 가서 트로피를 받을 때 열이 펄펄 나면서 진행했던 세미나 생각이 나서 혼자 울컥했다. 사실 이 날은 남편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세미나를 하지 못했을 것 같다. 내가 직장에서 25년을 버텨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남편의 외조이다. 우리 남편은 회사 생활하는 내내 나를 많이 도와주었다.
다음으로 기억나는 일화는 좀 더 오래된 것인데 우리 회사에서 했던 고객사 세미나이다. 그때는 장염이 걸려서 고생 중이었는데 역시 일정을 바꿀 수 없어서 강행해야만 했다. 세미나실에 들어가려는데 속이 안 좋아서 화장실에 가서 구토를 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강연을 했다. 며칠 동안 설사와 구토가 지속되어서 서있기도 힘든 상태였는데 청중들은 내가 아팠던 것을 몰랐다고 하니 초인적인 힘이란 게 있긴 한가 보다.
나는 건강 체질이 아니고 잔병치례가 많아서 자주 아픈 편이다. 그래서 이런 긴급한 상황이 자주 발생했는데 많이 아플 때는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 내과에서 수액을 맞았다.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병원에 가면 한 시간 정도 누워서 링거를 맞을 수 있고 휴식도 취할 수 있다. 수액을 맞고 나면 일시적으로 기운이 회복되고 한두 시간 정도는 힘을 짜낼 수 있기 때문에 이 방법으로 위기를 넘기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까지 하면서 버티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25년 동안의 과로와 스트레스로 몸은 여기저기 망가졌고 회사에서는 제대로 된 보상도 못 받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처절하게 버티면서 회사를 다니는 것인지 회의가 들었다.
오랜 고민 끝에 회사를 그만 뒤야겠다고 결정했고 퇴직 날짜까지만 버티기로 하고 지내고 있다. 어떤 사람은 매일 회사에 출근하던 사람은 회사를 그만두고 나면 힘들 거라며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잘했다고, 그렇게까지 힘든 줄 몰랐다고, 그만하면 됐다고, 정말 고생이 많았다며 내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직장인들이 짊어진 무게가 다들 비슷하겠지만 나의 무게는 이러했다. 나를 믿어주는 고객사에 대한 책임감.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적어도 회사를 다니는 동안에는 내 이름에, 그리고 회사 이름에 먹칠을 할 수 없다는 오기, 이런 것들 덕분에 25년 동안 그렇게 악다구니로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모두 내려놓으려고 한다. 오십이 다 된 내 몸은 이 모든 시련을 견뎌낼 만큼 강하지 못하고 내 정신 또한 더 이상 피폐해지고 싶지 않다.
아래 사진은 몇 년 전 출장지에서 본 석양이다. 카메라로 석양의 아름다움을 다 담아내진 못했지만 이 석양처럼 아름답게 내려올 수 있도록 차근차근 은퇴를 준비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