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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에 글을 쓰며 길을 찾았다

by 아르페지오

브런치를 시작하기 전에는 내가 이렇게 쓰고 싶은 글이 많은지 몰랐다. 처음에는 그저 회사에서 하루하루 버티는 것이 버겁고 힘들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너무 힘들어서 동료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가 내 고민이 회사 내의 여러 사람들에게 중계방송이 되어버린 후 회사에서는 입을 닫았다. 힘들고 고된 하루하루가 쌓여가는데 터놓고 말할 이가 없으니 그저 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분노와 화를 표출하지 못하고 쌓아놓기만 하니 몸에 탈이 나기 시작했다. 만성 장염, 원형 탈모, 빈혈, 편두통, 온갖 병을 다 겪으면서 몸과 마음이 망가지고 있었다. 절대 남에게 손해 따위는 보지 않는 남편은 나에게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을 당하는 내게 문제가 있다며 오히려 나를 질책했다.

결혼을 하고 직장을 다니면서 아이를 키우느라 친구도 별로 없었다. 몇 안 되는 친구들도 자신의 삶을 꾸역꾸역 꾸려나가느라 여유가 없었다. 사는 곳도 멀리 떨어져 있으니 자주 만날 수도 없었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일기를 꾸준히 써왔지만 이전보다 더 자주 썼다. 가슴이 답답할 때마다 손글씨로 분노와 화를 쏟아부었다. 어쩌다가 우연하 몇 년 일기를 읽어보고 어쩌면 이렇게 똑같은 내용이 반복되는지, 도대체 왜 이 힘든 회사 생활을 견디고 있는 건지 나에게 실망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글로 감정을 쓰고 나면 감정이 정화되었다. 힘들 때마다 일기를 쓰고 또 썼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에 쓴 일기장들


그런데 일기를 쓰면서는 공감과 위로를 받을 수가 없었다. 참다 참다 어쩌다 한번 화를 냈을 때 잘했다는 칭찬을 받고 싶었다. 나를 공감해주고 내 마음을 토닥거려 주는 누군가가 필요했는데 일기는 나 혼자만의 것이니 공감과 위로를 구할 수가 없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의 글을 검색해서 읽다가 브런치를 알게 되었고 그들의 글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았다. 이런 경험이 차곡차곡 쌓인 후 브런치에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공대생이라 글재주도 없는 내가 공개적인 장소에 글을 쓴다는 것이 꺼려졌지만 브런치에서는 솔직하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따스한 사람들이 모인 이곳에서 위로와 공감을 받고 싶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글을 쓰다 보니 쓰고 싶은 주제가 하나둘씩 떠올랐다.


워킹맘으로 치열하게 고전 분투하며 대한민국에서 정시로 아이를 대학에 보낸 경험,

요리로 사춘기와 수험생 시절의 아이를 위로하고 나 자신도 치유했던 기억들,

개발자로 시작해서 강사, 그리고 프리세일즈로 일하고 있는 조금은 특이한 나의 커리어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일상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소소한 감정들...


쓰고 싶은 것들이 많아지니 하고 싶은 것도 생겼다.

사실 몇 년 전부터 퇴사를 고민했지만 여태 실행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하루를 어떻게 보낼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었다.

대학과 대학원 시절에도 항상 누구보다도 일찍 강의실에 도착해서 문을 열었던 내가, 직장생활 25년 동안에도 새벽같이 출근을 하며 바쁘게 살아온 내가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지면 은퇴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이 두려움 때문에 이미 오만정이 다 떨어진 회사를 그만두지 못하고 모진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고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다는 것이 나를 힘들게 하지는 않을까, 평생 회사원으로만 살아온 나의 삶을 다른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은 생각보다 컸다. 그리고 먼저 은퇴한 선배들까지 나를 말렸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데 제 발로 걸어 나가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 했다. 그저 버티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 했다.


그런데 이제는 두렵지 않다. 글을 쓰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일상을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그날그날 쓰고 싶은 주제를 생각해서 글을 쓰고,

나의 글에 어울리는 사진을 찾아 편집하고,

나와 공감해주는 사람들과 소통하다 보면 나의 하루가 채워질 것 같다.

나의 경험과 생각이 누군가에는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보람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 어딘가에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생겼다.


그래서 요즘은 퇴사일이 기다려진다.

이전에는 두렵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던 그날이 너무나 기대된다.


브런치에 글을 쓰고 나서 나는 길을 찾았다.

수학을 제일 좋아했던 공대생이 글을 쓰면서 기쁨을 느끼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인생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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