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는 젤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젤리류의 간식이 흔치 않아서 많이 접해보지도 못했고 사탕도 아니고 캐러멜도 아닌 물컹물컹한 젤리는 촉감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엄마가 되었고 아이가 젤리를 좋아하니 몇 번 먹어보았다. 어릴 때 즐겨 먹지 않아서 그런지 아이가 왜 젤리를 좋아하는지 이유를 몰랐다. 그래도 아이가 좋아하니까 가끔 사줬고 젤리 타입의 비타민도 사서 먹였다.
그렇게 이십여 년이 지났고 젤리를 좋아하던 아이는 이제 성인이 되어 젤리를 찾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집에는 항상 젤리가 구비되어 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젤리의 색감과 새콤달콤한 맛에 빠져버렸고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마다 젤리를 찾게 되었다. 아마도 몇 년 전 교육장에서 우연히 젤리를 먹어 본 이후부터인 것 같다. 업무 교육을 듣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강의 내용이 너무 지루했다. 졸음을 쫓기 위해 교육장에 있던 젤리 몇 개를 집어 왔는데 너무 맛있었다. 그리고 주말에 장을 보러 갔다가 그 맛이 생각나서 젤리를 몇 개 사 온 것이 시작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젤리와 친해지게 되었고 어느덧 젤리는 퇴근길 나의 짜증을 달래주는 친구가 되었다. 퇴근길 꽉 막힌 도로에서 한 시간 반씩 운전을 하다 보면 다리도 아프고 너무 힘들어서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났다. 저녁도 못 먹은 채 차 안에서 훌쩍 8시를 넘기게 되니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젤리를 사서 퇴근길에 오르기 시작했다. 작은 봉지에 담긴 젤리를 하나씩 먹다 보면 어느새 집에 도착하였고 그렇게 색색깔의 젤리가 나의 고된 퇴근길을 위로해 주었다. 매일매일 다른 종류의 젤리를 고르는 재미 때문에 퇴근길의 고단함도 잊을 수 있었다. 칼로리가 걱정되었지만 한 시간 반이나 걸리는 퇴근길 고통을 달래줄 친구는 젤리밖에 없었다.
이렇게 몇 년 전부터 나의 젤리 사랑이 시작되었는데 요즘은 재택근무를 하고 있으니 젤리를 먹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이상하게 젤리가 당겨서 다시 한 두 개씩 집어 먹기 시작했다. 갑자기 젤리가 먹고 싶어 진 이유가 궁금했었는데 드라마를 보다가 우연히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 드라마에서는 악당이 젤리를 먹는 장면이 나온다. 이 악당은 나쁜 짓을 하고 나면 꼭 젤리를 먹고 평소에도 젤리를 즐겨 먹는다. 악당이 젤리를 먹는 모습을 보면서 "다 씹어먹어 버리겠다"는 표현이 생각났다. 내가 좋아하는 젤리를 악당의 감정 표현에 사용해서 속상하긴 하지만 이 드라마 덕분에 요즘 내가 젤리를 다시 찾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는 퇴근길 꽉 막힌 도로에서 느꼈던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상사로부터 어처구니없는 지시를 받았을 때도 젤리를 먹었다. 엑셀에서 피벗 테이블을 돌리고 수십 억의 매출 데이터를 정리하는 업무는 평생 해 본 적이 없다고 간곡하게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평생 처음 해보는 일을 시키면서 잘 모르겠으면 Finance team 과장에게 배워서 하라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지시였지만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인사부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수 십 명의 세일즈가 매일매일 만들어내는 매출을 매주 취합해서 정리하는 업무는 평생 프리세일즈만 했던 내가 할 수 있는 업무가 아니었다. 게다가 영업 사원들의 매출 데이터 입력은 일요일 저녁에 완료되기 때문에 월요일 오전 8시에 데이터를 취합해서 보고하려면 매주 일요일 밤을 새워야 했다. 데이터를 정리한 후에도 추가로 입력된 내용이 있을까 봐 불안해서 월요일 새벽에도 한 시간에 한 번씩 시스템에 접속하여 숫자를 확인해야 했다. 잠도 못 자고 손에 익지도 않는 일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극도로 받았다. 생각해 보니 그때도 젤리를 먹으며 버텼다. 그런데 요즘 다시 젤리가 당긴다.
예전에 어디선가 껌을 씹으면 스트레스가 해소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야구선수들이 껌을 씹는 이유도 스트레스와 긴장감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씹는 행위가 스트레스와 긴장 해소에 효과가 있다는데 나는 아마 젤리를 씹으면서 이것을 경험했던 것 같다. 게다가 껌은 한번 입에 넣으면 그만이지만 젤리는 하나씩 골라 먹는 재미도 있고 색감도 알록달록 예쁘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상사의 갑질로 힘들었던 몇 개월 동안 젤리를 씹으며 분노를 풀었다. 프리세일즈 일을 잘하고 있는데 왜 이런 부당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화가 치밀었지만 이상하게도 젤리를 씹으면 분노가 가라앉았다. 이런 나의 심리가 궁금해서 검색해 보니 부장 껌, 사장 껌이라는 것도 있다고 한다. 세상에 나 같은 사람들이 꽤 많은가 보다.
요즘은 여러 가지로 힘들다. 변하지 않는 불통 상사 때문에 힘들고, 주말 저녁에 장문의 이메일을 보내는 동료 때문에 힘들고, 잘 풀리지 않는 고객사 이슈 때문에 힘들고, 끝이 보이지 않는 코로나 때문에도 힘들다.
여기저기서 스트레스가 나를 괴롭히니 다시 젤리를 찾게 되었던 것 같다.
퇴사까지 남은 몇 개월이 너무나 길다.
여행도 못 가고
친구들도 자유롭게 만나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풀 수가 없으니
시간이 너무 더디게 간다.
이 예쁜 젤리들이 나를 퇴사일까지 버티게 해 줄 수 있을지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