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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할 일을 끝까지 미루는 습관

by 아르페지오

나이가 들면서 나쁜 습관이 하나 생겼다.


해야 할 일을 끝까지 미루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모든 일을 다 미루는 것은 아니고 어떤 일들만 끝까지 미루고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며 겨우겨우 끝낸다. 대체 내가 왜 이러는지 이유를 몰라서 괴로웠는데 퇴사를 결심한 후에야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는 정말 그 일이 하기 싫었던 것이다. 하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니 끝까지 미루고 그러다 보니 시간이 부족해서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으면서 겨우겨우 했던 것이다. 이런 내 마음을 알지 못했는데 퇴사를 결심하고서야 알게 되었다.


참고로 학창 시절의 나는 뭐든지 미리미리 해 놓아야 마음이 놓이는 성격이었다. 과제 마감이 금요일까지면 적어도 수요일까지는 과제를 제출해야 마음이 편했고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잠이 오지 않아 미리미리 해치워야 하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회사를 25년 다니면서 어떤 일은 끝까지 미루다가 마감일에 촉박해서 해치우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회사에서 해야 하는 업무 중에는 적성에 맞지 않고 정말 하기 싫은 일들이 있다. 그러나 회사원이 하고 싶은 일들만 할 수는 없으니 그것들을 회피하면서 끝까지 미루게 된 것이다. 매일 조금씩 하는 것보다 짧은 시간에 몰아서 하면 싫어하는 일을 최단 시간 내에 끝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방법에는 위험 요소가 있다. 계산한 것보다 시간이 더 필요할 경우 데드라인을 맞추지 못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돌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연륜과 경험을 과신한 탓에 n시간이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일이 뚜껑을 열어보면 훨씬 더 걸릴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며칠 동안 잠도 자지 못하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싫어하는 일을 해야 한다. 계획에 차질이 생겨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비슷한 일을 해야 될 때면 어김없이 그것을 미루곤 했다.

그리고 내가 간과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스트레스를 덜 받기 위해서 일을 미룬 것인데 정작 일을 미뤄놓은 동안에도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마감일이 다가오는 동안 싫어하는 일을 회피하고 있지만 계속 쫓기는 기분에 시달린다. 잠을 잘 때도 숙면을 하지 못하고 악몽을 꾼다. 그 일이 너무 하기 싫어서 외면하고 있지만 여전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면 나는 평소에 하지 않는 행동을 한다. 예를 들면 집안의 구석구석을 쓸고 닦거나 물건 정리를 한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다 보면 잡념이 사라지고 일에 대한 부담도 잊을 수 있으니 청소를 하는 것이다. 구석구석 쓸고 닦아서 더 이상 청소할 곳이 없어지면 다음에는 물건 정리를 한다. 잘 사용하지 않는 서랍도 열어서 정리를 하고 창고를 열어서 필요 없는 물건들을 추린다. 떠오르는 잡념을 없애려고 쓸데없는 일을 만들어서 몸을 혹사하는 것이다. "폴린 월린"이라는 심리학자가 쓴 "내 안의 말썽쟁이 길들이기"라는 책에 이런 심리에 대해 잘 설명해 주는 내용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겪는 현상인 것 같다.


이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얼마 후면 퇴사할 거니 이 일만은 정말 안 했으면 했는데 내가 정말 싫어하는 일이 떨어졌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하루 전에 시작해서 겨우 완료했는데 막상 끝내고 나니 후회가 남는다. 퇴사하기 전 마지막 업무일 수도 있었는데 시간을 들여서 정성껏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 단기간에 해치우는 것이 나은지, 미리미리 해 놓는 것이 나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퇴사 결심을 하고 나서 내가 어떤 일들을 끝까지 미루었던 이유를 알게 되어서 기쁘다. 이전에는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힘들어하곤 했다.



얼마 전에 직장 내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회사원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그리고 후배가 뇌경색으로 쓰러져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 후배는 직장에서도 자신의 일을 완벽하게 하 했고 고3 아이의 뒷바라지도 하려고 아등바등하다가 그렇게 되었다. 골든타임 내에 수술을 했고 열심히 재활을 하고 있다고 담담하게 말하던 후배 얼굴이 떠올라서 가슴이 아리다.


퇴사를 결정하고 나니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인다.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현상들도 이해가 되고 내 마음속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그만둔다고 생각하니 이전에 아등바등하며 차지하려고 했던 것들이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다. 드글거리는 하이에나들에게 내 업적을 뺏기지 않으려고 안달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사니 예전보다 훨씬 덜 스트레스를 받는다.


작년 초에는 회사 일로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갑자기 숨이 잘 안 쉬어지기도 하고 몸도 여기저기 아팠다. 겁이 덜컥 나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는데 다행히 몸에는 이상이 없고 심리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종의 공황 장애가 아니었나 싶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차분 생각을 했고 더 이상 회사를 다닐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은퇴를 결정했다.


아이를 키우며 자신의 커리어도 지키기 위해 아등바등하다 쓰러진 후배의 이야기도, 직장 내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직장인들의 이야기도 남의 일 같지 않다.

회사에서는 매일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난다. 어처구니없는 일 투성이이고 어처구니없는 사람들 투성이인데 신기하게도 회사는 잘 굴러간다.


잡혀 먹히지 않으려면 더 독해져야 하는 이 정글에서 나는 이제 탈출하려 한다. 정글 속에서 힘들어하고 있는 다른 직장인들도 잠시 정글 밖으로 나와서 직장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밖에서 바라보니 내부에서는 도저히 풀 수 없었던 많은 고민과 문제가 사라졌다. 내가 한때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임을 알게 되었다.


직장 내 괴롭힘 때문에 자살하거나 스트레스나 과로로 쓰러져서 병을 앓게 되는 일들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각자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면서 서로 도우며 상생할 수 있는 회사가 있었으면 좋겠다.

일 잘하고 마음 착한 사람들이 성공할 수 있는 회사가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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