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치는 마음

by 아르페지오

몇 주동안 몸도 마음도 바닥으로 가라앉은 기분이라 글을 전혀 쓰지 못했다. 처음에는 몸이 좋지 않아서 기분도 다운이 되었는데 며칠 지나고 나니 몸이 안 좋아서 기분이 안 좋은 것인지 기분이 안 좋아서 몸이 안 좋은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런 상태로 몇몇 지인들이 추천했지만 우울한 분위기의 드라마 포스터 때문에 보지 않았던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번 보기 시작하니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하루에 서너 편씩 봐서 며칠 만에 끝까지 다 보았다. 지금 내 상횡이 드라마 주인공인 박동훈 부장과 너무 비슷해서 감정 이입을 하게 되어 열심히 보았던 것 같다.


드라마 속에서 이지안이라는 직원이 박동훈 부장에게 말한다. "어떻게 하면 월 오, 육백을 벌면서 저렇게 지겨워 보일 수 있을까, 후배가 자신을 자르려고 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성실한 무기수처럼 꾸역꾸역".

드라마를 보는 내내 그 대사가 뇌리에 꽂혀서 지워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그렇게 무기징역수처럼 꾸역꾸역 견디며 매일 회사를 간다. 너무 힘든 시간을 견뎌보려고 안 마시던 술을 마셔 보기도 하고, 평소엔 쳐다보지도 않는 비싼 물건을 덜컥 사보기도 하고, 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들을 배워보려 시도해서 즐거운 것처럼 자기 최면을 걸어보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몇 개월 혹은 며칠을 버티다가 정신이 들면 다시 바닥에 가라앉아서 헤어나지 못한다. 바닥에서 헤어나지 못해도 또 매일 꾸역꾸역 출근을 한다. 성실한 무기수처럼.


갑자기 그렇게 독하게 버틴 25년의 직장 생활에서 내게 남은 것이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퇴사 준비를 하나씩 해나가면서 아직도 내가 회사를 그만두는 것을 반대하시는 엄마께는 회사에 가면 숨이 안 쉬어진다고 말씀드렸다. 이렇게 살다가는 죽을 것 같다고,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다고 솔직하게 말씀드리니 이제는 더 이상 아무 말씀도 안 하신다.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는 드라마 포스터에서 풍기던 우울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해피엔딩이었다. 그러나 16회 내내 풍기던 우울한 분위기 때문에 마지막 회의 해피엔딩이 그리 인상 깊지는 않았다. 마지막 회에서 박동훈 부장은 어머니가 그렇게 원하던 상무로 승진을 하지만 회사를 그만두고 자기 사업을 시작한다. 처음으로 행복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나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25년을 그렇게 힘들게 버텼으니 나도 이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마음이 떠나고 나니 더 이상 괴로워하면서 버티고 싶지 않다. 이전에 통했던 임시방편들도 이젠 하나도 통하지 않는다. 평소에는 절대 사지 못하는 비싼 물건을 사서 나에게 선물로 줘보고, 월급이 없다면 하지 못할 사치를 누려보아도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무엇을 해봐도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으니 이젠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그런데 막상 그만두려고 하니 여러 가지 사소한 것들이 나의 발목을 잡는다. 평생 직장을 다녔기에 당연하게 생각하고 살았던 것들이 없어진다는 것이 덜컥 겁이 난다.


내 이름으로 신용카드 발급은 되는 걸까?

노트북은 하나 있어야 하는데 용돈으로 노트북을 살 수 있을까?

가끔 여행도 다니고 먹고 싶은 것을 사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용돈을 몇 년 정도 쓸 수 있을까? 등등의 여러 가지 생각들이 나를 괴롭힌다.

이런 사소한 생각들이 모여서 제 발로 회사를 나가는 것은 미친 짓이라며 나 자신을 설득하려 한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 몸이 너무 아픈데 휴가를 낼 수 없어 무기징역수처럼 꾸역꾸역 출근도장을 찍는 것은 더 이상 그만하고 싶다.

그만두고 나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오십이면 은퇴하기에 이른 나이도 아니라고 자신을 합리화해본다.


아마도 사직서를 낼 때까지 내 마음은 계속 요동칠 것 같다. 하루는 은퇴하는 것이 맞다고 하다가 하루는 제 발로 걸어 나가지 말고 조금만 더 버텨보자고 하다가 그렇게 매일매일 요동칠 것 같다.


20년이나 다닌 회사를 그만두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데 내 발로 걸어 나가는 것이 쉽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매일매일 결론이 나지 않는 고민으로 괴로워하다가 오늘부터 달력에 0과 1을 표시하기로 했다. 그만두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날은 1을 적고 조금만 더 버텨보자고 생각한 날에는 0을 적으려고 한다. 사직서를 내겠다고 마음먹은 그날까지 달력에 기록한 0과 1을 합산해본 후 최종 결정을 하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덜 후회하는 결정을 하기 위해 생각을 짜내고 또 짜내 본다.


요즘 파이어족이라는 것이 유행이라던데 어린(?) 나이에 은퇴를 결심하고 실행한 그들이 참 대단해 보인다. 나이 오십에도 사표를 쓰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데 마흔에 혹은 마흔도 되지 않은 나이에 은퇴를 하고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그들이 참 존경스럽다. 결단력도 없고 소심한 나는 통계에 기대어 결정을 하려고 한다.

오늘 달력에 기록된 숫자는 1, 퇴사하고 싶다. 내일의 내 마음은 어떨지 한번 기다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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