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설명이 안 되니 글을 쓰는 것이라는 바로 그것에 대하여. 보통 말로 설명이 안 되니 불립문자라고 한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인간은 왜 글을 쓸까?
글이 직관적으로 써지면 운율의 속도감이 있다. 그러면 '시'적이 된다. 그래서 시는 음악의 리듬이 있는 것이며, 동서양 모두 시의 원형은 운율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음악적인 것의 원형은 멜로디이며, 그 음악은 짧은 마디 형태가 분만된 것이다.
글은 결국 예술작품처럼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우니 글을 쓰는 것. 글은 작품이다. 예술이다. 작품은 원래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나의 글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논리성이라는 틀에 넣어서 , 다듬고 매끄럽게 결이 맞도록 가공하는 것이다. 음악의 변용이 글이다. 시가 서사가 된다. 서사에서 시가 나온 것이 아니다. 시는 삶 그 자체인 날것의 심층에서 분출되는 것이며, 서사는 그 분출에 의해 완성된 것의 새로운 이야기다. 그러므로 매끄러운 표면의 세계는 바로 이 완성된 세계를 의미한다.
오늘 크리스마스이브 음식을 만들어 먹으려고, 주방에서의 노동을 거치고 상차림을 하고 사진을 찍고, 그것을 정리하고 감상하면서 쉬는 내 마음은 매끄럽다. 이 과정은 3단 변신이다. 나의 삶의 찌꺼기들은 모두 내 심층에서 뒤섞인다. 크리스마스가 되니, 크리스마스가 가지고 있는 어떤 환상이 나에게 음식을 만들도록 어떤 충동이 인다. 그 과정의 순서를 지키며 만들어 가는 동안 나는 거기에 몰입한다. 비록 완전한 몰입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하나의 일에 집중할 때 그때 뇌는 휴식을 취하는 것일까? 어쨌든 이럴 때 직관은 활발하다. 나는 그 직관이 붙잡은 것들을 놓치지 않고 이렇게 글로 정리해 본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것을 말로 전해주면 몇이나 수긍하겠는가? 우선 단시간의 일이니 나부터 정리가 안 되고 두서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글은 일단 편집이 가능하고, 시간차를 신경 쓸 필요도 없다. 문장의 재배치도 가능하여 인과를 조작할 수도 있다. 글은 조각품처럼 끌로 다듬는 것이다. 끌이 펜 또는 요즘은 손가락이란 차이뿐. 글은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음악적인 것의 충동의 용출로 한 줄의 문장처럼 느껴지는 시가 직관으로 자신에게 찾아오면, 그것을 그 자신이 가공하면 작품이 된다. 그러니 이것들의 형태는 모두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에서 비롯되어 완성된 시 역시 작품인 것이고, 서사도 작품인 것이다. 인간이 자연 앞에서 작품이 되는 순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의 심층에서는 내가 집어넣어 준 모든 것들을 뒤섞여 어느 순간 음악적이고 시적인 형태의 단문장으로 송출한다. 나는 그것을 산출한다. 이러한 과정은 나에게 그동안 무수하게 반복되었다. 나는 이 반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니체 철학을 읽으면서 언어로 재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러나 니체는 이러한 것에 대해서 '유사'라고 쓰고 있으니 나도 그렇게 표현한다. 내가 찾던 동질성은 바로 그런 의미였다. 그러나 같은 형태이지만 그것을 같다는 표현보다는 '유사한 것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그 사이에 있는 것에 대한 감각을 충족하고 오해를 부르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