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신체사유

어떤 죽음과 디오니소스적 물결

예전 글과 지금의 생각을 섞었다

by 아란도


12월의 화려한 불빛이 사그라진다. 어떤 죽음들, 어제는 디오니소스의 고통에 대하여 문자로 알게 된 시간이었다. 문자는 조합인데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를 드러낸다. 나는 디오니소스의 고통이 찢긴 신체에 대한 고통이라고 받아들인다. 그것은 문자를 해독한 나의 생각이다. 흩어진다는 것, 개별화되어 형상이 사라진 것에 대한 고통, 하나이지 못한 것, 온전하지 못한 상태... 바로 이러한 것들이 디오니소스의 근원적 고통이었다. 그것은 곧 '죽음'에 대한 고통이며 존재 불안이었다.


요즘 시대는 한 사람의 삶이 난도질되는 풍경을 너무 자주 목격하게 된다. 이미 '하나'가 아니고 온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존재가 느끼는 고통은 극에 달하리라. 우리는 영상으로 여전히 '나의 아저씨'를 예감한다. 되돌아옴의 도래는 그런 의미일까? 거인들에 의해 찢긴 신체 훼손의 고통은 한 사람의 정신도 포함할 것이다. 존재는 언제나 그 상태에서 정당하고 또한 부당하다. 상호작용의 관점에서 존재는 작동하기 때문이다.


전에 낭독회에서 이에 대해 간략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 그것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는 것에 대해 요즘은 조금 다르게 접근하게 된다고...... "


내가 어제 디오니소스의 물결 부분의 문자 사이를 지날 때, 그의 관한 기사를 보았다. 순간 멍한 느낌이었다. 때로는 침묵이 더 많은 말을 하고 있는지도. 사람들은 현실의 과잉 경찰수사보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느낌과 대사들에 더 마음이 간다. 그래서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나의 아저씨>는 더욱 커진다.


디오니소스의 근원적인 고통은 하이데거의 존재 불안과 연결되어 있다. 인간이 느끼는 불안이 '신체 훼손'에 대한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면, 한 사람의 명예 훼손 역시 신체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한 존재가 온전한 삶을 살고자 하는 그 염원은 정당한 것이다.


<비극의 탄생>의 한 대목을 내 식대로 해석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라는 근본 인식, 그것은 바로 개별화가 악의 원초적 근거라는 관점에서 비롯된다. 이에 반대급부로 보상이 작동한다. 이것은 마치 눈의 맹점 현상과 같은 원리다. 그리스인들의 명랑성이, 오이디푸스 신화의 지옥을 보고 다친 눈을 명랑성 복제 방식으로 치유하듯이. 이 방식으로 미와 예술은 기쁨을 주는 희망이며 다시 도래할 '일치의 예감'이다."


이 대목에서 무언가 가슴을 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다. 보통은 개별화의 원리를 독립된 존재, 개인으로 보지만, 여기에서 다시 생각해 보면, 왜? 하필 합창단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 되고 있다. 개별화와 대립되는 것은 합창단이다. 개인과 집단이다.


다시 살펴보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라는 근본 인식이 있고 거기에 개별화가 악의 원초적 근거라는 재인식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는 '집단'이고 개별화는 '개인'이다. 여기서 다시 그럼 왜 개별화가 악인가? 개인이 악인가? 책 속에서는 흩어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신체 찢김은 공기, 물, 흙, 돌로 변하는 것과 같은 것, 그것이 디오니소스의 고통을 만든다" 여기서 개별화는 하나에서 여러 개로 흩어지고 또 서로 다른 것들의 결합이 풀린 상태로 되돌아가고, 섞이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뻣뻣하게 경직되고 차가운 상태, 즉 죽음을 의미한다.


디오니소스의 물결 또는 디오니소스의 힘은 서로 섞이게 하여 생명을 만드는 것에 있다. 아폴론적인 개별화는 그대로 놔두면 결국 딱딱하게 굳어서 말라버린다. 죽음이다. 그러지 않도록 디오니소스의 물결이 밀려와 전복시키면 다 뒤섞여 혼돈을 만든다. 그리고 이내 새로운 질서가 도래한다. 인간에게 미와 예술이 영원히 정당한 이유는 아폴론적 꿈의 상태에서 개별화의 원리가 실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서로 맞물려 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제우스와 거인들의 공모에 의한, 디오니소스의 신체 찢김의 사건은 자연에 역행하는 일이었다. 생명은 자라는 것이 일이며 자연의 순리다. 그러므로 그 사건이 원인이 되어 근원적인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존재불안의 원인이 죽음이라는 것은, 개별화의 고통 때문이다. 흩어져서 하나로 존재하지 못하는 고통. 이 메커니즘에 집단과 개인을 대입하면, 개인의 고통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파악할 수 있고, 개인들의 행동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인간이 집단을 욕망하는 것과 자연을 욕망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사회적 문제와 검찰의 문제는, 공룡적인 것이 한 개인을 호출하여 집단과 분리하여 유폐시킬 때이다. 그러나 그 유폐 장소가 사거리이며 알몸 상태다. 지나가며 돌 던지라고 효시한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공포를 전시하여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존재불안을 정면으로 이렇게 건들면, 디오니소스 물결이 밀려오게 되어 있다.







2018/05/18일에 썼던 글 한 대목이다


몇 회 보지는 못했다. '나의 아저씨' 종영회를 시청했다. 나는 여기에서도 그 나름의 생각들이 파동을 그리며 나의 생각을 완결 짓기를 요구하는 것을 느꼈다. '나의 아저씨' 드라마가 내보내는 그 감성이 좋다. 감성이 좋다는 것은 이성이 담보되어 있으니 신뢰해도 좋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일 테니까 말이다. ' 삶을 만들어 주고 만들어 갈 수 있는 관계만이 좋은 것'이다.


어떠한 형태일지라도 한 사람이 성장하는 데에는 가족보다 큰 단위가 필요하다. 그리고 다시 개인들이 그 개인으로 알알이 보이면, 그것이 모든 자기의 삶을 관통하여 하나로 모아준다. 삶의 일관성은 그 에너지(사랑일지도...)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그 에너지로 관성을 만든다. 삶을 만든다. 삶이 만들어져야 사람이 사람으로 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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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보고 느꼈던 짤막한 소감이었다. 그토록 시리게 슬프고 아름다운 드라마의 느낌은 영원히 남는다. 바로 그것이 인간 그리고 우리의 정서이니까. 그러한 것들은 계속 되돌아온다.


나의 아저씨, 배우 故이선균 님의 명복을 빕니다()








#이것은시입니다 /2017/12/28


<어떤 죽음들>


모든 철학과 시와 문학은 누군가들의 무덤이다. 누군가들 그 자신들이 죽고 또 죽어서 일궈진 것들. 그 안에서 그리도 달콤하게 잠을 잔 이들 누구인가. 무덤에서는 오래 쉴 일은 아니다. 모든 인문학과 문화는 누군가들의 주검으로 이루어졌다. 죽어본 자들이 일군세계, 그 세계를 거치지 않고서 어찌 무덤에서의 달콤한 잠을 깰 수 있을 것인가. 달이 높이 떴다. 아이야, 이제 다시 길을 나서야 한다. 무덤을 뒤로하고 떠나자. 오래된 세계에서 신세계로 가자꾸나. 너의 세계로. 자신의 집을 짓지 않으면 곧 유령들이 너의 달콤한 잠에 쳐들어 올 것이다. 아이야, 이제 잠에서 깨렴. 곧 동이 틀 것이다.


* 죽은 자와 산자가 공존하는 길은, 죽어본 자들과 죽은 자들이 일군 세상을 여행하다가, 널려 있는 것들이나 숨겨진 것들을 스스로 줍거나 획득하여 빠르게 빠져나오거나 느리게 걸어 나오거나, 이다. 그리고 끊어진 자기 길을 이어, 바로 보이는 그 길 위에서 춤추며 자기 길을 걸어가는 것.


* 존재와 시간에 대한... 문득, 산자가 죽은 자를 만나고, 살아서 죽은 자가 죽어서 산자를 대면하는 시간, 살아나야 할 자가 죽어본 자를 어찌 대접해야 할까?를 서성거리며 고뇌하는 시간. 산자가 산자들과 만나서 서로를 이해 속으로 묶어내는 시간. 존재의 시간은 순간에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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