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 머그잔의 권력을 생각했다. 저 머그잔 하나가 만들어낸 세계의 카페권력을 생각했다. 그 권력은 생각보다 부드럽고 생각보다 조용하고 생각보다 산뜻하다. 새벽아침의 카페는 조용조용하였다. 불빛은 어둡지 않았으나 새벽이라는 배경이 주는 분위기 때문인지, 침묵하는 새벽의 느낌 때문인지, 카페의 불빛은 바닥에 내리깔리며 밝기를 유지하는 것처럼 다가왔다. 거의 모든 자리가 다 찼다. 비어 있는 자리에 가서 앉는다. 의자를 빼는 소리마저도 너무도 크게 울리는 것처럼. 새벽 권력을 생각했다. 재즈가 흐르는 아직은 어둑한 새벽이었다. 이러한 느낌을 만들어 공급하고 이러한 느낌을 소비하는 쌍방 이해의 권력을 생각했다. 일어서려고 코트를 여미다 말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기에 어울리는 사람인가? 새벽에 어울리는 사람인가? 나는 지금 이 공간에서 혹여 라도 이방인이 아닌가?라는 생각 말이다. 하지만 이내 이 새벽 이 공간이 경쾌하도록 편안하게 내 안에 스며들었던 직전의 내 모습을 상기하였다. 그러자 조금 안심이 되었다. 내 정신이 편안하게 여겨졌다면 잘 스며든 것이었다. 일어서며 의자를 밀어 넣는데 끼익 소리가 났다. 머그컵을 내려놓는 데 소리가 났다. 걸어 나가는 내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아, 이 모든 소리들을 조금만 더 재웠어도 좋으리라.
새벽이다. 카페가 권력이 되는 이유, 그 공간을 향유하면서 만들어지는 권력은 서로가 위배되지 않을 때뿐이다. 얼마나 위태위태한 것이던가. 위태로운 것들은 언제나 등 뒤에서 미묘한 웃음들을 웃고 있다. 무엇을 알아가거나 만나는 것은 언제나 위태롭다. 그 위태로움이 언제나 권력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바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미묘한 웃음이 무엇인지도 알아야 한다. 그 미묘한 웃음을 보는 자가 권력을 본다. 쌍방 권력행사를 보는 것이 제대로 보는 것이다. 시가 힘을 욕망하는 것도 역시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러나 이쪽도 저쪽도 아니다. 비참에서 비참을 보고 비웃음에서 비웃음을 짓는다. 그러나 비참과 비웃음은 같은 자리에 있다. 코트 깃을 세우고 새벽길을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