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예정했었던 <니체 읽기> 낭독 마지막 권, 한 단락만을 남겨두고, 다시 연말 방학을 하게 되었다.
오늘은 <디오니소스 송가>와 음악에 대한 니체의 견해가 수록된 <니체 대 바그너>를 읽었다.
<디오니소스 송가>를 들으며 이렇게 생각했다. 신체에 가해지는 고통과 그 고통이 어느 순간 환희로 이전되는 과정에 대한 노래라고. 디오니소스적 고통에 대해 니체는 그의 저작 어디에서나 말하고 있다. 이토록 고통에 대해 엄격하고도 철저하게 해체한 철학자는 아마도 니체가 처음일 것이다.
<니체 대 바그너>에서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비극적 인식을 우리 문화의 가장 아름다운 사치로, 우리 문화의 가장 값비싸고 가장 고귀하며 가장 위험한 종류의 허비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우리 문화가 너무나도 풍요롭기에 허락된 사치로 받아들였다.
마찬가지로 나는 바그너 음악을 영혼의 디오니소스적 강대함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했다. 바그너 음악에서 나는 태곳적부터 봉쇄당해 온 삶의 근원력을 마침내 숨 쉬게 하는 지진 소리를 들었다고 믿었다.
사람들은 알 것이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알 것이다.. 내가 바그너와 쇼펜하우어에게 무엇을 선물했었는지를 ㅡ 나는 나를 선물로 주었던 것이다...... 모든 예술, 모든 철학은 성장하거나 하강하는 삶의 치유 수단이나 보조 수단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것들은 언제나 고통받는 자를 전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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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비극의 탄생>을 출간할 때, 서문에서 바그너에게 헌정하는 내용을 넣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니체의 고통은 그만큼 반감되었을 것이다. 그를 누르는 무게도 덜 하였으리라.
하지만 이미 일어난 사건이었고 니체로서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 자신이 반대하는 것에 대한 그 무게를 평생 견뎌낸 것일지도.
현재에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 당시의 바그너주의자들의 바그너 도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났었던가 보다. 그런데 현재에서 바그너 음악은 현대적 음악으로 스며들어 있는 것 같다. 한 시대를 견인하기도 하였다고 보인다. 극장 문화도 그렇다.
유럽인들이 사교의 활동으로 극장을 활용하였듯이 현대에서도 그렇다. 공연문화는 이제 하나의 문화로 정착되었고 그에 걸맞은 에티켓도 필수가 되었다. 반면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취향의 문화 역시 더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한 상태까지, 다층적이며 다채롭게 조직되며 다시 변이 되는 형태로 나아간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니체에게 나의 생각과 현시대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 중이다.
오늘 낭독 후에, 우리(다경,미류,현영,연수,아란도)는 '한강 작가의 노벨상 시상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니체를 읽고 있고, 노벨상 시상식의 첫 음악은 바그너의 '탄호이저' 에서의 <그대 고귀한 전당이여 - 엘리자베스의 인사>였다.
작가 한강/ 애 많이 쓰셨습니다. 축하드리고 감사합니다!
그 이야기를 서두로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그때 웃음이 나왔다. 왜냐하면 어떤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면, 게다가 그것이 백이십여 년 전의 이야기라면, 더구나 각각의 인물이 어떻게 살았는지 일대기가 이미 파노라마처럼 나와 있는 상태라면, 우리는 역지사지해서 서로를 파악하는 시선을 가질 수밖에 없다.
노벨상 시상식에서 바그너의 음악을 첫 곡으로 선택한 이유를 내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사람들은 니체와 바그너를 화해시키고 싶어 한다라고. 그런데 그것은 화해라기보다는 오히려 공존에 가까울 것이었다.
현재에서 보면, 니체는 니체대로, 바그너는 바그너대로 그 유용적 깊이와 확장이 있었다. 나는 또 생각했다. 바그너 음악이 흐르면 자연스레 니체로 흐른다. 이것은 고도의 노벨상 시상식 관계자들의 기획인 것일까?
노벨 문학상 시상 전, '한강 문학 비평'을 낭독할 때, 그 비평을 들으며 나는 디오니스스적인 고통받는 인간에 관한 해석이라고 생각되었다.
만약 고통에 대한 깊이와 그 고통이 가져오는 어떤 의미의 도약에 대해 우리가 어떤 개념적 정립이 없다면, 우리는 과연 그것에 대해 이해하고 대화할 수 있을까? 공감을 넘어서서 어떤 품격을 갖추고 그 '고통받는 인간'그 자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동양과 서양을 넘어서서 인류라는 하나의 공통적 사유에 도달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중심에 니체가 서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무수한 전쟁과 무수한 학살과 무수한 죽고 죽임과 무수한 고통과 그 고통을 전이하는 고통받는 인간이 있다. 인간은 연약하고 취약하지만, 인간은 또한 그보다 더 강하고 포용적이다.
니체가 디오니소스적 고통이라고 명명했을 때, 이미 서양과 동양은 하나의 언어가 만들어진 셈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영매' 또는 '무당'이라는 비유적 표현에 빗대어 말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표현에 대해, 그 상태를 표현할 말이 모호하기에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영매나 무당이라는 뜻 역시 가교 역할이 본 뜻일 것이니, 틀린 표현인 것만도 아니며, 이런 말에 거부감 드는 것 역시 편견일 수도 있다. 다만 편견을 가지게 만드는 사회 현상의 지속됨과 그러한 편견을 고착화시키는 어떤 사회적 암묵적 합의도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교량자'라고 말한다. 최후의 자들과 위버멘쉬의 교량자로서의 차라투스트라를 말하였다. 나는 노벨 시상식을 보았고, 또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한편에서 떠오르고 있는 생각을 낚아채어 글을 쓰고 있는 중이다.
니체는 '고통받는 자'라는 표현을 만들어 내었고, 고통받는 자의 원형은 디오니소스에게서 왔다. 하나의 말과 수직적 깊이의 의미와 확장적 개념이 하나로 모아져 사건이 될 때, 그것은 철학이 된다고 생각한다. 니체의 개념은 그대로 차라투스트라에 투영된다.
나는 '한강'은 '차라투스트라'같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고통으로 상징되는 인간의 신체를 통하여, 그 신체 안에 내재된 기억들과의 조우와 정신적으로 연결된 이원적 세계를 신체로 조율하며 균형을 잡고 마침내 두 세계를 통합한다. 자기 안에서 그리고 세계 안에서, 그리고 다시 현실의 세상에서 동양과 서양을 실질적이며 물리적인 생산성으로 연결시킨다.
철학자의 이러한 언어표현 계발이 없이 과연 동양과 서양의 소통이 원활하게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오늘의 한강은 동서양이 모두 그 토대를 미리 예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 이름이 '한강'이다. 차라투스트라처럼. 인류의 고통을 전달할 수 있는 자, 디오니소스적 고통을 감지하고 극복할 수 있는 자, 그러한 사람, 인류의 코어 같은 신체적 감각을 내재한 자, 나는 차라투스트라를 그렇게 인식했고 보았고 읽었다.
내가 마지막 낭독 주자였다. 늘 그렇기는 하지만, 낭독을 하면 등과 머리에서 땀이 난다. 아마도 목소리 발화도 운동이기 때문일 것이다. 니체 읽기와 한강 노벨상 수상 이야기를 마친 후 나는 등 뒤가 땀에 다 젖어 있었다. 우리는 온몸으로 책을 읽나 보다.
연말 방학이 지나면 이미 새해다. 새해에 다시 낭독 시작이다. 현재 우리나라 상황은 모두 아시다시피 이러하지만, 한강의 노벨상 시상식은 자랑스러운 순수한 기쁨을 주었다. 금욕주의자 같은 한강 이미지, 그 이미지가 어떤 거리의 파토스적 대비를 이루며 우리에게 잘 스며들었다고 생각한다. 그 마음이기에 그렇게 이미지도 새어 나오는 것일 것이다. 망토와 마법 지팡이를 하나 손에 쥐어주면 금세 마법사가 될 것 같은, 언제나 소녀의 이미지로 떠오르는 한강의 모습이었다. 이상도 하지! 그렇게 고통을 청동에 새기듯 쓴 글이 사람들의 대화로 오면 사람들을 또 웃게 만든다. 사람이 갖는 이중의 힘적 흐름은 그렇게 크로스 되며 다시 길을 떠난다. 모두가 웃는 새해를 맞이할 수 있도록 연말을 가열차게 잘 보내기를 바라보며, 우리 모두 우리를 보우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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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으로 사진은 한강 노벨상 시상식사진을 올려본다.
한림원 사무총장 '마츠 말름' 손님맞이 대접을 아주 잘하신 듯. 한강 작가의 에스코트도 손색없었어! 잘하셨소~ 디어 말름 씨! ( 이것은 내가 놀이 삼아 써 본 이야기지만, 왠지 그 풍경을 보고 있으니 나는 좋더라~)
한림원이 노벨 문학상을 '한강'으로 선정한 것은 시대의 목소리였다고 생각한다.
한림원 에서의 한강 작가가 그 자신의 문학에 대해 강연을 할 때에는 어떤 귀족적 느낌이 관통하였는데, 그것은 모두 듣고 있는 '청취'에 있었고 또한 한림원 그랜드 홀의 내부 정경이 엘레강스 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또한 그중에서도 고고한 선비 같은 청취자인 말름씨 때문이기도 하었다.
한 공간을 빛내는 것은 정말이지 태도에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귀족적인 파토스는 정적감을 이겨내는 것에 있었다. 읽는 이도 듣는 이도 공간에 퍼지는 그 목소리에 의해 동시에 침묵 상태로 듣게 된다. 그 긴장감을 온몸에 느끼며 소리의 진동을 견디는 것이다. 그때 목소리가 말하고자 하는 그 무엇이 전달된다고 생각한다. 음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공간에서 진동하는 소리가 신체를 두드리는 것과 같다. 그런 긴장감을 닫힌 공간에서 이겨내는 훈련이 잘 된 그 이미지가 바로 귀족적인 것일 것이다.
* 그냥 대표로 마츠 말름씨를 선정해서 글을 써 보았다.
'엘렌 마트손'의 한강문학 비평을 듣고 있으니, 나는 정말이지 니체가 아니라면 이런 해석은 나올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문학이 철학에 영향을 미치고 철학은 다시 문학에 영향을 미치고 다시 철학은 문학을 해석하는 틀이 되어 준다. 단지 형식은 녹아들어서 뼈대를 이룰 뿐 보이지 않는다.
한강의 '흰'의 '흰 도시'에서
드레스덴이라는 명칭과 해리스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아도
우리가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를 알아차려야 하듯이, 고통과 죽음, 통증에 대하여 말하고 있을 때 아직 보이지 않고 있는 사랑과 희망과 환희를 향한 몸부림이란 것을 알아차려야 하듯이, 그 말이 부재하고 있을 때 오히려 그 말이 근간을 이루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하듯이, 동서양의 공통언어 철학이 근간의 틀을 이루고 해석의 툴이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