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 동안에 썼던 내 글을 읽어 본다. 지금 써야 할 글은 이미 그때 다 쓴 것 같다. 나는 여기서 데자뷔를 느끼는데, 다만 이번 건은 좀 더 복잡성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때는 꼬리를 내리고 박근혜 탄핵에 찬성했던 자들이 이번에는 질기게 버티고 있다. 그들이 그때 어느 부분에서 쉽게 포기했던 것은 '다음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테면 그 당시에 '계엄령'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는데, 이번처럼 구체적 실행까지는 방법론이 나오지 않았던 것일까?
좀 더 복잡성이 드러난 만큼 이번에는 그러한 복잡성에 대해 기록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지난 십여 년간 나는 몸과 사유와 느낌으로 글을 썼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아래 글은 2017년 오늘(1월 2일) 쓴 글이다. 제목을 지금 붙이자면 "수준"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것은시입니다>에는 당시에 내가 일반적인 글과 거리를 두는 방식, 그러니까 조금은 거리를 두어서 직접적이지 않도록 하는 방식도 있었다. 아무래도 이러한 형태의 글은 메커니즘적이고, 시대와 나의 부단한 교섭이며 그 시대를 인식하는 나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곧 특정 인칭은 떼버려도 말이 성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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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시입니다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밝아오니...
이것은 시입니다. 를 연일 줄곧 올리게 된다.
사람의 간교함에 대하여 박근혜 4년에 확연하게 깨닫게 된다.
사람이 수준을 논한다는 것은, 그 자신의 인생의 길과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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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언제나 상대를 그 자신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뜨려 같이 진흙탕에 뒹굴어야만 직성이 풀리는가 보다. 사람의 비참함은 거기에 있었다.
같이 진흙탕에 빠진 채로 나뒹굴어야만 겨우 그 자신은 자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어 대화가 된다. 절대로 제대로 된 말로는 대화가 안 되기 때문이다. 서로 위안이나 주고받으면서 서로에게 묻어 있는 진흙을 보고서야 안심이 되어 친구임을 서로 확인한다. 같은 종자임을 확인하고서야 스스로 우월감의 쾌재를 부르곤 한다.
위로 도약은 안 되니 아래로 끌어내렸을 때만 상대를 제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너도 그 정도자나... 그래야 친구지... 같이 진흙탕에 굴렀을 때만 친구가 되는 것이다.
일종의 공범의식이라고 할까...?
공범들이 공유하는 내용들이 모두 참으로 진부하다. 그러나 그 당사자에게는 아픈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인류가 그걸 딛고 넘어서 오지 않았다면, 인류에게 자존감 따위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인류가 좀 더 성숙한 사회를 만들었다고 친다면, 그것은 그 본능적인 고통들을 딛고 일어섰기 때문일 것이다.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은가? 어찌하여 인간이 수준을 논하게 되었는지! 왜 말이 통하는 사람과 친구가 되려고 그리도 친구를 사귐에 공을 들이는지에 대하여.
친구란 곧 자기의 보증수표와 같은 것이다. 친구를 사귐에 수준을 따지는 것에 있어서, 그 자신이 제외된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겐 가장 비참한 일일 것이다.
생각해 보라. 예컨대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수준이 낮아져야만 비로소 말이 통한다는 그 참담한 현실에 대하여, 같이 진흙탕에 뒹굴지 않으면 도저히 서로 한마디도 섞을 수 없다는 바로 그것에 대하여, 철저하게 끌어내려져야만 하고 바닥에 내팽게쳐져야만 겨우 대화가 된다는 것에 대하여.
또 역으로, 냉소와 비난과 남 탓과 무시로 일관된 세계, 그 세계 자체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스스로를 그렇게 적응시키곤 한다. 그러고서 그 세계가 전부인 줄 안다. 그렇게 자신과 관계된 타자들을 자신의 수준으로 하락시킨다.
범죄가 따로 있겠는가? 인간에게 고통을 주면 인간 사회에서는 범죄다. 그 범죄는 인간의 수준을 하락시킨 그 자체로 성립된다. 인간에겐 수준이 낮아지는 그 자체가 곧 상처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래서 이꼴저꼴 보기 싫어서 은둔하게 된다. 섞이기 싫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섞여주는 이들이 있어서 세상은 평균을 유지한다. 점차로 상향 평준화 된다. 누구나 조선시대 선비의 삶을 지향하지 노비의 삶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사는 것은 오두막일지라도 정신의 지향은 가장 높은 척도에 맞추는 게 보편적인 인간의 지향점이다. 그런데 수준이 바닥인데 그 바닥으로 떨어져 같이 나뒹굴어야 한다면, 거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인간은 수준을 높이고 싶을 때만 같이 바닥에서 뒹굴어 준다. 그게 아니라면, 수준을 아는 인간이 친구가 없다면 차라리 혼자 놀고 말지 구태여 바닥에서 뒹굴 일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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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4년의 수준은 진흙탕에서 온 국민이 같이 뒹군 시기였다. 딱! 자신의 수준에 맞게 4년을 말아먹었다. 그 비참한 시간을 관통하는 순간들 마다 어쩔 수 없이 진흙탕에 몸을 담가야 한다는 것을 모두 안다. 같이 더러워져야만 끝난다는 것도 모두 안다. 그 더러움을 감수하고 일어설 때만이 수준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모두 안다.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이 말은 정정되어야 한다. 무서운 건 자기 자신과 관계이다. 여기엔 균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러운 것은 청소해야 하는 것이지 기피할 대상이 아니다. 자기 손에 더러운 것이 묻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더러운 곳에서 계속 살아야 한다. 쓰레기는 치우는 게 맞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자리만 옮겨 치우는 게 아니라 쓰레기는 청소차에 확실하게 실어 보내는 게 맞다. 그다음은 쓰레기 처리 시스템 가동을 제대로 작동시켜야 한다.
인간이 인간임을 증명하는 것은 상대의 수준을 훼손시키지 않았을 때이다. 인간이 자기 아닌 타자를 접할 때 거부감이나 뭔가 어색하다면, 분명하게 자기 안의 심리가 무엇인지 점검해 보야야 한다. 그것이 자기가 결여하는 부분이라면 자기 안에서 통합해 내어야 하고, 자신이 이미 버린 것이라면, 자기 안에서 자라지 않도록 거리를 두어야 한다. 인간이 자기를 극복한다는 것은 상대를 해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상대를 해치지 않으려면, 인간 안에서는 엄청난 갈등과 고통이 곤두서게 된다. 그걸 극복하는 게 인간이다. 그럴 때 인간은 비로소 수준을 말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이 서로 섞여야 함은 까마귀와 백로를 들먹이지 않아도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수준을 높이려는 인간의 부단함은 멈추지 않는다. 그런 부단함이 곳곳에 존재한다. 그걸 발견하거나 조우했을 때, 그때가 인간으로서 자기 뼈를 깎아야 할 때임을 알아야 한다. 기회는 빠르게 지나가 버릴 뿐이다. 시기를 놓치면 그렇고 그렇게 같이 진흙탕에서 뒹굴 이들만 찾게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