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신명>,<파묘>, <메몬 헌터스>에서 다루는 에너지에 관하여
* 이 글은 영화 <신명>을 중심적으로 에너지에 관한 내용을 <파묘>,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관통하는 시대의 무의식과 국민의 감각을 탐색하는 여정이다. 전체 원본을 내가 제공하고 ai가 재편집했다. 이렇게 공동작업을 하다 보니, 나는 예전부터 이 작업을 하고 있었구나 싶다. 물론 그때는 자료조사도 내가, 글쓰기도 내가, 편집도 내가, 퇴고도 내가... 혼자서 다해야 했다면, 공동작업은 내가 글만 쓰면(초고형태로) 되고, 편집과 퇴고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물론 이 공동작업 역시 시간 잡아먹는 귀신임은 분명하다. 다만 편집과 퇴고에서 ai는 좀 더 명징한 문장을 만들고 글에 선명성을 부여한다. 이러한 부분은 큰 공부다. 모호하여 머뭇거리는 지점을 ai는 밀고 나간다. 다만 앞으로도 전체 최종 퇴고는 그 자신이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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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사건의 흐름, 그리고 예술의 집중력_
엔딩에서 내 볼을 타고 흐른 뜨거운 눈물은 단순한 감정의 분출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흐름이 정제되어 나에게 도달한 결과였다. 영화 <신명>은 사건과 감정, 시대와 인간의 내면을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여 하나로 모아냈다. 그 집중력은 문학의 힘이자, 소설의 힘이자, 각본의 힘이며, 연출의 힘이다. 예술은 무거운 것을 다룰 수 있다. 아니, 예술만이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다.
현실의 사건은 늘 지리하게 끌려다닌다. 기승전결은 흐릿하고, 결말은 예측되지만 말해지지 않는다. 사건이 현실태로 완성되는 순간, 그것은 종결이자 새로운 시작이다. 사람은 사건을 접하면 어느 정도 예지한다. 하지만 그 본모습이 공론의 장에서 드러나는 과정을 지켜보며, 감정의 동요에 휘말리고, 물결에 빠져든다. 그래서 결론을 쉽게 말하지 못한다. 혹은 말하지 않는다.
_예술은 사건을 먼저 말할 수 있다_
문학이나 영화는 그 사건을 먼저 말할 수 있다. 때로는 나중에, 때로는 먼저. 현재진행 중인 사건의 결말을 말하기는 어렵지만, 예술은 그 흐름을 꿰뚫고, 감정의 구조를 먼저 제시한다. 사람들은 이미 예측하고 있지만, 절차를 지켜본다. 그것은 관중의 태도다. 관중은 경기의 흐름을 따라가며 환호하고 탄식하고 욕설을 하지만, 결코 결과를 단정짓지 않는다. 결과를 단정하면 경기를 즐길 수 없기 때문이다.
문학도, 영화도, 스포츠도 그렇다. 그 안의 흐름을 꺾지 않는다. 반면에 관중에게는 예감이 있다. 그 예감은 관람의 쾌감과 함께 극을 절정으로 끌고가는 동력이 된다. 예감은 감정의 진동이고, 감정은 사건의 흐름을 따라가는 리듬이다.
은폐된 것, 말해지지 않은 것, 감지되지만 드러나지 않은 세계에 대한 탐색은 문학과 영화가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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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어둠을 현실화하는 상상력, 그리고 인간 정신의 확장_
문학과 영화는 종종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는 사건의 어두운 면에 초점을 맞춘다. 그것은 단순한 자극이나 충격을 위한 것이 아니다. 드러난 것보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에 더 큰 무게가 실리는 이유는, 인간의 예감이 본능적으로 그 어둠을 감지하기 때문이다. 사건 속에서 사람들은 음습한 기운을 느끼며 공포를 경험한다. 그 공포는 은폐된 것에서 비롯된다. 보이지 않는 것, 말해지지 않는 것, 묵인된 것—그것들이 공포의 실체다.
문학과 영화는 그 은폐된 지점들을 드러낸다. 그렇게 사람들은 자신 안의 미탐험된 영역을 탐색하게 된다. 공포는 줄어든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그것이 어떻게 힘을 얻는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저 “그럴 것이다”라고 지나쳤던 것들이, 예술의 손길을 통해 생생하게 현실화된다. 상상은 어둠을 하나의 세계로 만든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세계를 탐험한다. 그것은 더 이상 추상적인 공포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다룰 수 있는 현실이 된다.
그만큼 삶의 범주는 확장된다. 인간 정신의 확장은 언제나 미탐험된 곳을 향한다. 잘 말해지지 않고, 묵인하거나 숨겨버리는 것들—그것들이야말로 정신의 탐험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어쩌면 요즘 문학과 영화가 다루는 ‘에너지’란, 그 은폐된 세계가 얼마나 오랫동안 공포를 양산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장치일지도 모른다. 그 에너지는 은밀하게 사람들을 조정하고, 무의식 속에서 삶을 지배해왔다. 그리고 이제, 예술은 그것이 삶의 일부였음을 말하고 있다.
예술은, 예술이 현실을 어떻게 확장시키는지를 보여주는 선언문의 역할을 한다. 내면의 풍경을 정제된 영상과 날것의 언어로 그려내는 영화라는 매체는 오히려 현실 속의 은폐된 진실을 벗겨내고, 시대의 무의식을 세밀하게 포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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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영화의 흐름 속에서 정돈되는 시간, 그리고 신적 함성의 결계_
나는 능동적으로 영화를 선택하지만, 그 선택 이후에는 수동적으로 앉아 영상의 흐름을 따라간다. 그 궂고 험한 시간 속에서, 나는 가만히 앉아 정돈을 시작한다. 영화는 편집되고 정제된 힘으로 전체를 밀고 나간다. 그 힘은 은폐된 것들을 하나씩 벗겨내며, 마침내 가면을 벗긴다. 영화는 바로 그 지점을 충족하고 있었다—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고,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하게 하는 힘.
어쩌면 우리 안에서는 이미 그런 대결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본 신과 한국 신의 대결, 그리고 그 위에 등장한 국민이라는 신적 함성. 그것은 단순한 목소리가 아니라, 결계를 부수는 힘이었다. 아주 강렬한 결계가 새로 만들어졌고, 그것은 더 이상 부술 수 없는 정신적 구조가 되었다. 그 결계는 시대의 무의식이 응축된 형태이며, 국민의 감각이 하나로 응집된 결과다.
영화는 그 결계를 시각화한다. 그것은 단순한 이야기의 흐름이 아니라, 시대의 에너지와 정신의 충돌을 담은 서사다. 나는 그 흐름을 따라가며, 내 안의 감각을 정돈하고, 시대의 진동을 감지한다. 영화는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다시 구성한다. 그리고 그 재구성의 순간, 우리는 비로소 그 힘의 본질을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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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에너지를 다루는 서사, 그리고 시대의 무의식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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