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크레티우스를 비판하는 몽테뉴(1)
왜냐하면 어느 감각이 없다면 우리의 사고력은 그 결여를 알아차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것의 마지막 한계라는 것이 감각의 특권이다.
감각 너머에서 감각을 발견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아가 한 감각이 다른 감각을 발견할 수도 없다.
청각이 시각을, 촉각이 청각을 바로잡을 수 있는가?
또는 미각이 촉각을 면박할 수 있는가?
또는 콧구멍이, 또는 눈이
다른 것들더러 틀렸다고 할 것인가?
_루크레티우스_
그것들 모두가 우리가 지닌 능력의 최종 한계이다.
그것들 하나하나 별도의 기능과 능력을 갖고 있다.
_루크레티우스_
혹시 인류에게 어떤 감각이 없어서 그와 같이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지나 않은지, 그 결여로 인해 우리가 사물의 면모 중 대부분을 지각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알 게 뭔가? 그 때문에 우리가 자연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닌지 알게 뭔가? 우리 능력을 초월하는 동물들의 여러 행동은 우리에겐 없는 어떤 감각 능력이 만들어 낸 것이고, 그것 때문에 그들 중 어떤 것들은 우리보다 더 충만하고 완전한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아는 게 뭔가?
폭넓은 지배력을 갖지 않은 감각, 그 지배력으로 무한 수의 인식을 만들어 내지 않는 감각은 없다. 만일 우리가 음, 화음, 목소리를 파악할 능력이 없다면 나머지 모든 지식에 상상할 수 없는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각 감각의 고유 효과에 결부된 것 말고도, 한 감각을 다른 감각에 대조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다른 일들에 대한 추론, 결과, 결론들을 끌어내는가!
그런 감각 하나나 둘, 또는 세 가지가 결여되었을 때,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칠지 알게 될 것이다. 만일 그것이 우리 안에 있다면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오감五感의 상의와 협동을 통해 한 진리를 생각해 냈다. 그러나 그 진리의 핵심을 분명히 파악하기 위해선 어쩌면 여덟이나 열 가지 감각의 동의와 협력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인간의 지식을 공격하는 철학 학파들은 주로 우리의 감각이 불확실하고 허약하다는 것을 들어 공격한다.
모든 인식이 감각을 수단 삼아, 감각의 중개로, 우리에게 들어오는 만큼, 감각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보고에 실수가 있다면, 감각이 밖에서 운반해 오는 것을 부패시키거나 변질시킨다면, 감각을 통해 우리 영혼으로 흘러 들어오는 빛이 도중에 흐려진다면 우리는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이런 극단의 난관으로부터, 각 사물이 우리가 그것에서 발견하는 모든 것을 자기 안에 지니고 있다는 둥, 우리가 봤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둥 하는 온갖 헛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태양이 우리 눈에 보이는 것 이상으로 크지 않다는 에피쿠로스파의 망상 역시 그렇다.
어쨌든 그것의 크기는
그것이 운행될 때 우리가 보는 것보다 크지 않다
_루크레티우스_
한 물체가 가까이 있는 사람에겐 크게 보이고 멀리 떨어진 사람에겐 작게 보이는 두 가지 외양 모두가 참되다고,
그렇다고 우리 눈이 틀렸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정신 오류를 눈에 전가하지 말자.
_루크레티우스_
결국 감각에는 어떤 속임수도 없다고 그들은 단호히 말한다. 그러니 감각에 복종해야 하며, 우리가 거기서 발견하는 차이와 모순을 설명한 이유들은 다른 데서 찾아야 하고, 감각을 비난하기보다는 다른 거짓과 잠꼬대를 꾸며 내기라도 해야 한다(그들은 이 지경에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에세 2> 12장에서 발췌
몽테뉴는 이 단락에서 루크레티우스를 두 방향에서 인용한다. 감각에 대한 맹신을 비판하는 방향에서와 감각에 대한 불신을 인정하는 방향에서이다. 몽테뉴는 에피쿠로스주의인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에 본성에 관하여>를 인용하여, 감각의 기능을 해부하는 동시에 감각의 맹신을 같이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루크레티우스 책의 내용으로 에피쿠로스를 해부하는과 동시에 에피쿠로스의 긍정적인 부분 역시 동시에 수긍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에세 2〉 12장, 『레몽 스봉을 위한 변호』에서는 신적 존재에 대해서 만큼은 단호하게 옹호하고 있다.
아마도 인간의 육신의 한계를 자각한 몽테뉴는 자연이나 사물이나 인간이 변화하는 존재라는 그 허망함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있음’의 존재인 신을 더 강렬하게 대비시킴으로써 오히려 허무함을 극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몽테뉴의 말대로, “모두가 그를 자기에게 끼워 맞추는 것을 자랑삼으며 자기가 원하는 쪽에 눕혀 놓는다.” 일수도 있지만, 어쨌든 사람은 그 자신이 지향하는 바에 맞게 정신을 각색한다. 종교적인 해석이나 철학적 해석이나 모두 그 지향하는 바에 따라 달라진다.
종교 역시 시대에 따라 같은 사안에 대해 조금씩 해석이 바뀐다. 필요에 따른 것이다. 감각의 문제를 다시 재거론하여 철학은 시대의 방향을 틀었다. 감각을 문제 삼자마자 거기에 연동되는 정신 작용들이 드러났다. 감춰진 많은 것들, 지각, 주의, 기억, 감정, 상상, 인지, 오성, 이성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철학은 시대를 넘어서려고 시대에 해석에 해석을 가한다. 기존 해석을 비트는 것이다. 그러면 전혀 다른 새로운 관점이 나타난다. 이렇게 굳어 있는 해석을 비틀고 거꾸로 보면 다시 그 시대가 보이는 것이다. 그 시대를 해석할 수 있어야만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