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5.감각의 특권

by 아란도



"감각의 문제에 관한 나의 첫 번째 고찰은", 인간이 자연에서 작동하는 모든 감각들을 갖추고 있는지를 의문시하는 것이다.
<에세 2> 12장 중에서


이 문장은 니체가 “내 미학의 첫 번째 명제는”이라고 말한 것과 유사하다.


니체가 말한 니체 미학의 첫 번째 명제는,


"선한 것은 가볍고, 신적인 모든 것은 부드럽게 물결처럼 부드럽게 흘러간다."


이다. 이 문장은 '책세상 니체 전집 제15권' <바그너의 경우> 1장에 나오는 문장이다.


내가 여기서 관심을 갖는 것은 '유사성'이다.

"감각의 문제에 관한 나의 첫 번째 고찰은"과 “내 미학의 첫 번째 명제는” 이 서로 겹쳐서 나에게 올 때, 어떤 쾌감이 있었다. 누가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가 무에 그리 중요할까마는!(철학자들이 그러한 연결 루트를 잘 밝히는 것은 아니니까).


나는 그런 유사성이 파급되고 있는 지점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서로의 생각들이 어디서는 일치하고 어디서는 갈라지고, 그리고 서로 불일치한다고 해서 그 사상들을 버리는 것도 아니다. 몽테뉴 역시 에피쿠로스파를 비판한다고 해서 에피쿠로스파를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비판을 통해서 대척점을 만든 후 자기 사유를 이끌어 내는 것뿐이다.


이러한 낱낱의 철학들을 한데 모아보면, 어떤 형태가 그려진다. 그때 하나로 작동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이라고 그런 것을 몰랐을까?(물론 몰랐을 수도 있다. 처음부터 저 깊은 메커니즘들이 다 발견되었다면 또는 다 언어로 설명되었다면, 후대의 사람들은 할 일이 없지 않겠는가!)


몽테뉴의 <에세>에서 시적인 문장이나, 어떤 문장이 내포하는 의문들과 그의 생각은 그 후의 후대 철학자들에게 영감을 풍부하게 주었다고 여기게 하는 문장들이 곳곳에 있다.


이를테면 이러한 단락이다. <에세 2> 12장에서는 이 단락을 골랐다.


가운뎃손가락을 꼬아 얹은 채 검지손가락으로 화승총 탄알을 조작할 때 탄알이 하나뿐이라고 확신하려면 극도로 정신을 긴장시켜야 한다.

그만큼 강력하게 감각은 탄알이 두 개인 것처럼 느끼게 한다. 그리고 사실 '감각이 자주 이성을 지배한다'는 것, 이성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가짜로 판단하는 인상들을 받아들이도록 이성에게 강요한다는 것은 모든 일에서 드러난다.
<에세 2> 12장에서 발췌



이 부분을 후대의 철학자들은 몽테뉴의 이 책을 아주 흥미롭고도 감명 있게 읽었을 것이다. 긍정하는 부분과 반론해야 할 부분과 새로이 파헤쳐야 될 부분이 산적해 있으니 말이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한 무더기로서의 〈에세〉는 철학의 보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만큼 몽테뉴가 철학이나 과학이나 자연과학 그리고 문학을 광범위하여 흝었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그나마 몽테뉴가 '에세'에 인용하는 내용들은 최상의 존경의 의미로서의 오마주였을 것이다. 그 나머지는 그 자신의 생각과 문장에 그대로 스며들어 그 자신으로 화하여 글로 나온 것일 것이다.


“감각이 자주 이성을 지배한다는 것”, 이것은 감각을 감성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석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면 이성은 곧잘 넘어간다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감각, 감성, 이성은 후대 철학자들의 주요 레퍼토리였다. 이러한 인간의 판단력에 대한 문제는 철학에서 한 시대의 진통을 예고한 것과 같다.


<에세>는 사유의 소재들에 대해, 글을 쓰는 방식이나 단락 구성, 문장의 배치가 상당히 부드럽다고 여긴다. 물 흐르듯이 흘러간다. 니체 미학의 첫 번째 명제, "선한 것은 가볍고, 신적인 모든 것은 부드럽게 물결처럼 부드럽게 흘러간다."라는 표현은 <에세>에도 당연히 해당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감각은 어떤 대상에 대해 그저 인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어떤 일치점이 전달되면 감성은 쾌감을 느낀다. 감성은 그것들을 추려내어 정렬시킨다. 이성에게 그렇게 하도록 강요한다. 나는 이러한 생각 속에서 들뢰즈를 본다.


몽테뉴는 판관이라고 하는 판단력에 비중을 두고 있다. 살짝 드는 의구심은 몽테뉴가 이 판단력은 순수하게 '이성'이라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감성에 바탕을 둔 이성인지에 대해서는 다소 모호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점반적으로 보자면 나는 몽테뉴가 감성에 바탕을 둔 이성주의자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자신을 변론하는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하는 자기 성향이 소개된 글을 읽을 때면, 상당히 시크한 사람 같은데도 불구하고 그 바탕 정서는 풍부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몽테뉴를 "AI보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 바탕 위에서 사유하는 것 같다. 아마도 AI의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의 뻔뻔함을 탑재한 자존감적 어투는 몽테뉴를 참고한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백과사전 같은 몽테뉴의 지적 풍부함은 차치하더라도, 자신이 오해받는 것을 상당히 불편해하는 느낌은 역력하다. 자기감정에 이렇게 솔직하게 반응하여 그 자신을 변론하는 사람, 때로는 까탈스러운 성격이라는 인상도 준다. 그런데 그 자신은 또 집에 있을 때 치장하지 않는다고, 그런 것을 불필요하게 여긴다고도 고백하고 있다. 반면에 그 자신은 예법에 해박하다고 밝히고도 있다. 알지만 불필요한 격식은 지양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때에 맞춰 그때그때 알맞게 살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니까,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그는 그냥 요즘의 우리 일상을 사는 우리와 생각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지점에서 나는 몽테뉴에게 현대적인 느낌을 받는 것이다. 그는 16세기 귀족이었지만, 몽테뉴의 사고는 반드시 16세기 귀족 방식을 고수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확장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현대인을 만드는 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므로 요즘의 현대인들은 이미 몽테뉴처럼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어떤 삶의 차별을 생각하고 있다. 몽테뉴가 이런 풍경을 보았다면, 아마도 '어리석다' 했을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