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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해석하는 자의 정신

by 아란도






사람들이 호메로스가 한 말이라고 하는 말 모두가 호메로스가 의도했던 말일 수 있단 말인가? 신학자, 입법자, 장군, 철학자 등 학문을 다루는 사람들, 그것들 제각각 다르고 서로 모순되게 다루는 모든 종류의 인간들이 그에게 의지하고 그를 연관시킬 만큼 그가 그렇게 많고도 다양한 면모를 보였다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가 모든 업무, 작업, 장인의 총괄 교사요, 모든 사업의 총괄 고문이란 말인가? 신탁이나 예언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든 그에게서 자기 일에 필요한 예언을 찾아냈다.

내 친구인 한 박식한 인물이 거기서 우리 종교를 위해 어찌나 놀라운 일치점들을 끌어내는지를 보면, 그리고 그것이 호메로스의 의도였다는 생각을 쉬이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을 보면 놀랍기만 하다(그만큼 호메로스가 마치 우리 시대 사람인 것처럼 그에게 친숙하다). 그런데 그가 우리 종교에 유리한 구절이라 여기는 것은 이미 옛적에 많은 이들이 자기들 종교에 유리한 것으로 여겼던 것들이다.

플라톤을 가지고 법석을 떨며 흔들어 대는 것을 보라. 모두가 그를 자기에게 끼워 맞추는 것을 자랑삼으며 자기가 원하는 쪽에 눕혀 놓는다.

그를 끌고 다니면서 세상이 받아들인 모든 새로운 견해에 개입하게 한다. 일이 다르게 돌아가면 거기에 맞춰 그를 그 자신과 모순이 되게 만든다.

우리 시대에 불법이라는 이유로, 그의 시대엔 합법적이었던 풍습을 그가 단죄한 것처럼 만든다. 이 모든 것이 격하고 강하게 주장되니, 해석하는 자의 정신이란 그만큼 강하고 격한 것이다.

<에세 2> 12장에서 발췌




몽테뉴는 해석의 유불리에 따라 고전의 내용이 유불리에 따라 각색된다고 말하고 있다. 아마도 니체의 관점주의는 몽테뉴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 틀림없다. 해석하는 자의 정신에 따라 같은 것이라도 다르게 보인다. 하나가 들어서면 그것은 다양하게 해석된다. 그러나 가장 존재에 근거하는 해석이야말로 절대성을 상정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기에 몽테뉴는 절대적인 초월적인 신의 존재와 대비해서 인간을 변화하는 존재로 본다. 아마도 대비라는 말도 불경스럽다고 여기리라.


신적 자유를 인간의 자유로 가져온 주체 정신에 의해 과학이나 예술은 변화해 온 것이리라. 진리를 밝히려고 과학을 신봉하지만, 그 과학이 밝혀내는 자연의 진리 역시 변화하는 것일 뿐이다. 변하지 않고 시작도 끝도 없이 있음의 존재인 신적인 것, 그래서 나는 구조론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모든 것을 가정할 때, 그 무엇인가는 반드시 있어야 말이 되기 때문이다. 종교적으로 신을 받아들이든 말든 그것은 종교의 문제이지 나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것이다. 내가 필요에 따라 신을 갈구한다 하여도 그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죽음과 사후의 문제를 종교가 이미 상상해 놓은 것을 참고할 뿐, 거기서 멈추지는 않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해 보기에 이 글도 쓰고 있는 것처럼.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든 안 받아들이든, 자연의 변화도, 영원한 있음의 존재도 하등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창조하였거나 만든 것이 아니니까. 그건 나의 영역도 나의 관심사도 아니다. 상관이 있는 것은 지금 여기서 내가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이다. 나는 고전들이 말하고 있는 내용들에 대해 내 생각을 곁들여 보는 것이다. 내 삶을, 나를 좀 더 나은 내가 되도록 해 보는 것이다. 나(인간)를 고양시키는 것 말고 내가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철학은 나에게 그렇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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