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크레티우스를 비판하는 몽테뉴(2)
한 물체가 가까이 있는 사람에겐 크게 보이고 멀리 떨어진 사람에겐 작게 보이는 두 가지 외양 모두가 참되다고,
그렇다고 우리 눈이 틀렸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정신 오류를 눈에 전가하지 말자.
_루크레티우스_
결국 감각에는 어떤 속임수도 없다고 그들은 단호히 말한다. 그러니 감각에 복종해야 하며, 우리가 거기서 발견하는 차이와 모순을 설명한 이유들은 다른 데서 찾아야 하고, 감각을 비난하기보다는 다른 거짓과 잠꼬대를 꾸며 내기라도 해야 한다(그들은 이 지경에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에피쿠로스파에게 헛소리 중에서도 가장 터무니없는 헛소리는 감각의 힘과 그것이 만들어 내는 효과를 부인하는 것이다.
가까이선 네모난 것이 멀리 서는 왜 둥글게 보이는지
이성이 설명할 수 없다 해서,
자기 손안에 있는 명백한 증거를 버리고,
우리가 믿는 최초의 것을 위태롭게 하고
우리의 생명과 보존의 모든 근거를 흔드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 두 모습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낫다.
왜냐하면 우리를 절벽이나 여타의 실족으로부터 지켜 주고,
반대편으로 인도하는 감각을 더 이상 믿지 못하는 그때부터
이성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기 파괴될 테니까.
_루크레티우스_
이 절망적이고 너무도 철학적이지 못한 충고는, 비합리적이고 정신 나간 억지 이성으로밖엔 인간 지식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 그래도 인간은 우쭐대기 위해 자기의 어쩔 수 없는 어리석음을 고백하기보다는 아무리 망상적 일망정 이성을 비롯해서 다른 구제책을 모두 써 보는 것이 낫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참으로 한심한 진리다!
감각이 자기 앎의 최고 스승이라는 것을 인간은 피할 수 없다. 그런데 감각은 어떤 상황에서건 불확실하고 사실을 왜곡할 수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우리는 서로 결사적으로 싸우고, 나아가 정당한 수단이 없으면, 사실 그렇지만, 고집, 무모함, 뻔뻔함까지 동원하게 되는 것이다.
직관적 감각은 그 자신의 앎의 스승이다. 반면에 외부에서 들어오는 피상적 감각은 기분에 따라 좌우된다. 이 기분을 이겨내는 것이 바로 지성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걸 이기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이 기분에 의해서 인간은 변화를 선택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인간 사회에서는 에티켓과 매너가 생겨났다.
예절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거리감(거리의 파토스)’이다. 요즘 사회에서 이 거리감을 강조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시피 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히려 “호의를 권리로 받아들이게”되는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하니까 말이다. 선線이 어디까지인지를 인간은 계속 찾는다. 그 선이 발견될 때까지 인간은 계속 침투한다. 그리고 문득 선을 발견하게 된다. 그전까지는 서로가 그 선이 어디인지를 모른다. 한계를 발견함으로 인해서 인간은 비로소 방향을 틀 수 있다. 한계가 역린이다. 역린은 그렇게 인간 사회에 만연하게 포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선을 찾아 불나방처럼 전진한다. 그리고 뜨거운 불에 서로가 덴다. 그때 선이 확인되면서 ‘거리감’에 대한 감각을 갖게 된다.
이 학습의 효과를 통하여 인간은 에티켓과 매너를 만든다.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인식을 삶에 적용한 그것이 예절이다. 윤리적인 것은 개인과 개인에게 더 가까운 말이다. 도덕은 이것을 공론화하여 사회에 적용하여 하나의 지표로 만든 것이다. 선 넘지 말라고 공공연하게 못을 박아 놓은 것이다. 그렇게 사람은 교육되었다.
인식이 개인적 강도에서 자율적으로 드러나는 형태가 윤리적 영역이며, 인식이 사회적 강도로 강압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 도덕이라고 볼 수 있다.
윤리(Ethics)는 개인의 내면적 기준에 초점을 둔다. 행동의 동기, 의도, 이유를 중시하며,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가 중요하다. 철학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기반으로 하며, 다양한 가치와 관점을 수용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진다. 진실성, 공정성, 자유, 정직함, 배려 등은 완만한 강도의 윤리적 기준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도덕(Morality)은 사회적 규범이나 문화적 기준에 따라 정해진 행동 원칙을 따른다. 외부적인 규칙에 기반하며, 사회 질서 유지와 타인과의 관계에서의 존중을 강조한다. 법률, 종교, 관습 등에서 파생된 규범으로, 집단 내 일관된 행동을 유도한다. 도둑질과 살인 금지 같은 사회적 금기가 대표적이다.
윤리는 "왜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당위성을 묻는 철학적 질문이라면, 도덕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묻는 사회적 지침이라고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윤리와 도덕의 차이점은 이러하다.
윤리는 기준이 개인의 내면적 가치와 신념이라면, 도덕은 사회적 규범과 문화적 관습이다. 윤리의 판단 방식은 행동의 동기와 의도 중심이며, 도덕은 행동의 결과와 규칙 중심이다. 윤리의 유연성은 다양한 관점이 수용 가능한데 반해서, 도덕은 집단 내 일관성을 강조한다. 윤리와 관계된 사고들은 정직함, 공정성, 배려가 관계되고, 도덕과 관계된 실천적 행위들은 법률 준수, 관습 따르기 등이다.
그런데 이 선을 넘는 자들은 공공연하게 또 넘는다. 그럴 때 사람은 위기감을 느낀다. 윤리와 도덕이 사람의 정신과 삶에 체득된 상황에서 어떤 도덕이 힘을 잃으면, 인간은 윤리로 맞선다. 사회에 갑자기 빈 공백이 드러나면 어떤 형태로든 그 빈 곳을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새로운 도덕이 또 만들어진다. 우리는 이러한 파괴와 전복의 순간을 살고 있다. 하지만 개인 윤리가 지나치게 강조되면, 도덕이 힘을 잃는다. '거리감'이 사라져서 완충지대가 없어진다. 힘 있는 개인이 힘없는 개인을 압박하게 된다. 한편으로 도덕이 지나치게 강고해져 윤리를 압박하면 사회가 경직된다. 사회가 경직되면 동맥경화 사회가 된다. 우리는 지금 어디쯤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