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연
반전을 넣은 스릴러 장르에서 꽤나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하고 엄청난 다작 중인 정해연 작가님의 작품. (연간 4-5편의 장편을 발간 중이니 team 정해연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책의 앞표지를 통해 절반을 읽고 뒤표지를 통해 나머지 절반을 읽게 하는 특이한 구성이다. 잊을 만하면 또 발생하고 또 발생하는 노인 운전미숙으로 인한 교통사고가 소재이며, 작가님의 특기인 반전도 적절히 활용된다. 사고로 가족이 죽은 피해자의 무너진 일상과 피폐해진 마음과 끝없이 터져 나오는 분노, 실수로 사람을 죽게 한 가해자의 (용서할 수는 없지만) 딱한 사정과 죄책감이 눈앞에 선연하게 그려진다. 피해자 입장인 전반부는 딸을 잃은 엄마의 끝없는 분노가 내내 손에 잡히듯 표현되어 읽는 내내 기가 빨린다.
곧 팔순이 되시는 우리 아버지도 아직 조심조심 시골에서 운전을 하시는데(굴삭기 운전도 거뜬히 하신다), 아직 시력이나 반사신경에 문제가 없고 시골에선 차 없이는 아무 데도 못 가기도 하며, 서울에 계시면 기운이 쭉 빠져서 집에만 계시는 모습에 매번 운전 조심하시라고 말씀만 드리고 있다. 언젠가 면허를 반납하시는 게 어떠냐고 말을 꺼내면 크게 화를 내실 것 같은데 고민이다.
비단 노인뿐 아니라 젊은 사람들도 운전할 때는 항상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조심 또 조심하자.
혹시 책을 읽으실 분들은 아래 스포가 있으니 피해 가시길...
시작하자마자 어느 노인의 운전미숙으로 주인공의 여고생 딸이 등굣길에 차에 치여 사망한다. 주인공인 엄마는 정신이 반쯤 나가 딸의 시신을 영안실에서 확인하고 믿을 수 없는 죽음에 미친 사람처럼 경찰서로 달려간다. 분명 브레이크를 밟았다고 말하는 노인의 말에 분노하여 뺨을 날리고 돌아온다. 조사를 받고 있는 딸의 장례식에 가해자와 가해자의 딸이 변호사와 함께 찾아와 합의를 종용하고, 그들과 다투다가 (또, 이번엔 가해자의 딸의)뺨을 때리기까지 한다. 장례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격한 슬픔에 사로잡힌 주인공은, 블랙박스를 확인하자 차량 결함이 아니라 운전 미숙이었다는 조사 결과에 분노한다. 남편과 둘째의 모든 행동을 꼬투리 잡으며 그들을 원망하고, 가해자 쪽에서 합의가 진행되지 않자 5천만원의 공탁금을 걸었다는 소식에 격노한 주인공은, 초범이자 장례식에 찾아와 사과하는 반성의 모습과 적당한 금액의 공탁금까지 고려하면 기껏해야 징역 1년이나 집행유예가 나올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남은 정신까지 나간 듯 칼을 들고 가해자를 찾아간다. 어두운 밤, 주인공은 구석진 주차장의 차로 무언가 사들고 가는 가해자 노인을 발견하고 차 앞에서 그의 배를 칼로 찌르고는 뒷걸음질 쳐 다급히 집으로 도망친다. 아내를 도저히 견딜 수 없던 남편은 이미 둘째를 데리고 집을 나간 상태고, 주인공은 자신이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고는 혼란스러워한다.
여기서 전반전이 끝나고, 책을 뒤집어 반대편부터 다시 읽기 시작한다.
노인은 아내를 잃고, 학원 강사로 일하는 딸의 집에 얹혀살게 된다. 최근 집을 구매해서 열심히 벌어야 하는 딸 부부는 아들을 할아버지에게 맡긴다. 초등학교 1학년 손주를 돌보며 자신의 시간은 거의 없이 가사노동과 돌봄에 모든 시간을 쏟지만 그래도 노인은 행복하다. 새 집으로 이사하면서 학교와 거리가 멀어진 손주를 처음에는 버스로 데려다주려 했지만 불친절한 기사의 거친 운전에 버스 이용은 힘든 일이었다. 결국 자신이 꺼려하던 자가운전을 통해 손주를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우회전하다 갑자기 튀어나온 전동킥보드를 피하다가 여고생을 들이받고 그녀의 죽음을 목격하는 동시에 가해자가 된다. 분명 브레이크를 밟은 것 같은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며 괴로워하는 아버지의 말에 딸은 급발진을 주장하자고 변호사와 대응 전략을 짠다. 전반전에서 나온 조문-합의-조사 결과-공탁의 과정이 동일하게 등장하고, 자신의 처벌 수위가 높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게 된 노인은 죽어가는 여고생의 얼굴이 계속 생각나며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공탁금을 걸기 위해 딸 부부는 새로 구매한 집을 다시 팔게 된다. 어느 날 사위가 술에 취해 들어와 노인을 원망하는 술주정을 부리고, 노인은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방 안에 틀어박혀 괴로워하다가 결국 그동안 시달리던 죄책감과 딸 부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한다. 이런 노인의 변화를 바쁜 일상에 찌든 딸 부부는 눈치채지 못한다. 어느 어두운 밤, 동네 슈퍼에서 고기와 술과 번개탄을 사서 차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노인을, 장례식장에서 봤던 피해자의 엄마가 달려들어 칼로 찌른다. 노인은 꺼져가는 의식을 마지막 죄책감과 양심으로 필사적으로 붙잡고 차로 들어가 칼에 묻은 지문을 지우고 번개탄에 불을 붙이고 죽은 학생에게 자신의 잘못을 빌며 죽어간다. 자살로 위장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