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해나, 김화진, 정이현, 예소연
언젠가부터 도서관 소설 서가 쪽에 제목만 덩그러니 있는 하드커버의 작은 책들이 하나둘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호기심에 꺼내보면 표지는 단일 색의 하드커버가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 지어져 있고, 각 칸에 띄엄띄엄 짧은 구절이 적혀있다. 책등에는 작가명도 없이 제목만 덩그러니 쓰여있어서 '대체 이건 뭐지' 싶어 책장을 넘겨보면 내가 아는 소설가들의 이름이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요즘 책 디자인 트렌드인가? 싶어서 해당 시리즈 홈페이지를 찾아 들어가 봤다. 위즈덤하우스라는 출판사가 만든 Wefic(Weekly Fiction)이라는 플랫폼에 소설가들이 짧은 소설을 공개해서 연재하고 그 책들을 나중에 출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표지의 비밀은 도서관 책이라서 벌어진 일이었다. 아래 사진처럼 띠지가 있어서 제목과 작가가 바로 보이는데, 도서관 책들은 띠지를 모두 제거하고, 작가명이 붙은 자리에 책의 청구기호 스티커를 붙여버려서 책등에는 제목만, 책표지에는 짧은 구절만 보이는 것이었다.
책은 딱 내 손바닥 만하고, 한 페이지 글자수도 보통 책의 1/2 정도에, 100페이지도 안 되는 단편들이라 30분-1시간 사이에 다 읽을 수 있어서 좋다. 하루에 열 권도 읽을 수 있게 생겼다.
지금까지 약 90편의 소설들이 이 방식으로 출간되었고, 오늘 내 손에는 네 권의 작품이 들려있다.
성해나 <우리가 열 번을 나고 죽을 때>
내 최애 작가님은 시간이 나면 건축 관련 서적을 읽으면서 영감을 얻는다고 한다. <두고 온 여름>의 작가 인터뷰와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가 수록된 <애매한 사이>의 인터뷰를 읽어보면 이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쓸 단어 하나하나를 어떻게 고르는지, 소설의 구조를 어떻게 설계하는지 잘 알 수 있다. 마치 집을 짓듯이 설계도를 그리고 터를 닦고 뼈대를 세우고 공간을 채워나간다. 그래서 여러 작품에서 공간 표현을 눈에 보이듯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아예 건축을 소재로 하는 작품도 있다.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
이 작품 또한 건축이 소재다. (다만 건축은 거들뿐) 작품 내 표현으로는 '에고'가 낮아서 스스로 얻은 A+ 학점까지 의심하는 건축과 학생이 주인공이다. 이 학생은 모든 것이 불안하다. 자신도 불안하고 재학 중인 대학교에서 건축과를 없앤다는 소문도 있다. 그럼에도 주어진 일은 잘 해낸다. 주인공을 눈여겨본 담당 교수가 주인공과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다른 학생과 짝지어서 방학 중에 경주에 있는 한옥 한 채를 들여다 보고 어떤 방식으로 집을 리모델링할지 숙고해 보라는 과제를 준다.
결국 건축이란, 특히 집을 짓는 건 그 안에 사는 '사람'을 간과하면 안 된다. 경주의 집에 사는 모녀와 두 학생, 그리고 교수와 마을 사람들까지 어떤 사건을 계기로 마을에 모이게 된다. 주인공은 사건을 겪으며 공간과 사람의 관계를 조금은 깨우치게 된다. 또한 '차경'이라는 개념이 소개된다. 건축과에서 '과제'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이 등장하는 말이라고 한다. '경치를 빌린다'라는 뜻인데, 건축물의 주변 경치를 건물 안으로 들여와 감상 대상으로 삼아 건축의 일부로 활용하는 것이다. 가령 한강이 보이는 집은 거실의 통창을 통해 강을 집 안으로 들여와서 공간을 넓히는 효과를 주는 방식이다. 경주의 오래된 한옥을 배경으로 건축이라는 소재에 인물들을 쌓아 올려 관계로 그 안을 채우는 작가님의 소설 구조를 톺아보며, 작품을 얼마나 공들여 설계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김화진 <개구리가 되고 싶어>
글로 수를 놓는 것처럼 인물들의 감정 흐름을 한 땀 한 땀 그려내는 김화진 작가님의 작품. 앞에 읽은 <우리가 열 번을 나고 죽을 때>와 비슷하게 대조되는 성격을 지닌 두 여성이 등장해서 서로 보완하는 관계가 된다. 가끔 이 작가님이 과도하게 인물의 감정을 파고 들어가서 읽는 사람이 삐끗하는 순간 방향을 잃게 되는데, 이 소설을 읽을 때 조금 그랬다.
정이현 <사는 사람>
오래전 <달콤한 나의 도시>를 쓴 정이현 작가님의 작품. 제목에서 '사는'은 거주하는-구매하는-삶을 영위하는 이라는 뜻으로 다양하게 읽히며 작품 안에서도 그렇게 해석되는 흐름을 볼 수 있다.
수학 전문학원(유명한 학원인 '생각하는 황소'를 모델로 한 학원으로 보인다)의 상담실장으로 일하는 주인공이 크게 두 가지 일을 겪는다.
주인공은 부동산 임장 모임에서 만난 남자와 코드가 맞아 사귀게 된다. 남자와 주인공은 집을 구매하지 않을 거면서(그만한 돈이 없다) 서울의 1급지 아파트들의 목록을 만들어서 주말마다 부동산을 돌아다니며 그 아파트들을 임장 한다. 성수의 어느 부동산에서 이 커플은 마치 그들이 어떤 의도로 임장을 하는지 파악한 듯한 중개사의 몇 가지 조치 - 구매자의 개인정보 공유, 계약금이 들어있는 통장 잔고 공개 등 - 로 마음이 상하게 된다.
주인공은 항상 학원에서 매뉴얼대로 일한다. 이 학원은 그날 배운 진도로 수업 후 시험을 봐서 점수는 실시간으로 학부모에게 1등과 꼴찌의 이름을 포함해 공개되며, 일정 점수를 몇 차례 못 얻으면 더 이상 다닐 수 없게 된다. (황소가 이런 시스템이라고 들었는데, 우리 아이는 저걸 견딜 수 없을 인물이라 애초부터 보내지 않았다) 어떤 여학생이 학원 시험 점수가 낮으면 집에서 매를 맞는다고 주인공에게 하소연하며 시험 문제만 미리 보여달라고 인스타 DM으로 부탁을 해온다. 주인공은 청소년 학대를 그냥 지나칠 수 없지만 직접 개입할 수는 없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 시험지 미리 보여주기. 누군가 길에서 도와달라고 청하면 그를 도우려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 것처럼. 하지만 이 일은 주인공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가는데...
두 사건을 겪으며 주인공은 대체 '사는'건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 스스로 답하며 자아를 찾는다.
역시 작가님이 중년 학부모라 그런지 중년 독자에게 소구하는 솜씨가 대단하다.
예소연 <소란한 속삭임>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마치 반지 원정을 떠나는 것처럼 파티원을 한 명씩 모집한다. 지하철에서 시끄러운 유튜브를 보는 사람에게 조용히 좀 하라고 말을 꺼내는(우린 보통 눈살을 찌푸리고 만다) 시내를 모아가 돕게 된다. 시내는 모아에게 속삭이는 모임에 가입하라고 권유한다.
규칙 1 "비밀을 속삭이진 않으나 그것이 마치 큰 비밀이라도 되는 양 속삭여야 돼요."
그리고 나누는 속삭임.
"저는 호박을 싫어하지만 아무도 그걸 몰라요."
"왜 아무도 몰라요?"
"그냥 먹으니까요."
"싫어한다고 말 안 해요?"
"안 해요."
"왜요?"
"싫어한다고 말하는 게 더 싫어서요."
규칙 2 " 중요하지 않아도 속삭임으로써 중요해져요.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 허투루 하는 말은 없는 거죠."
사실 아무 내용이 아니어도 속삭이게 되면 괜히 비밀을 나누는 것 같고 더 집중해서 들어야 한다. 둘은 다음 날 명동에서 만나서 시끄러운 사람들을 찾는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수자에게 접근해서 모임에 참여하라고 권유하는데, 처음엔 경계하는 수자를 누그러뜨리는 속삭임이란 역시 뜬금없는 고백.
"저는 청약이 당첨됐는데 잔금을 치르지 못해서 아파트를 날린 적이 있어요."
그렇게 수자가 모임에 합류하고 셋은 속삭이는 것뿐 아니라 시끄럽게 구는 모임도 시도해 본다.
규칙 3 "속삭임으로써 우리는 세상의 전부가 된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속삭이는 동안에 예수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하면 안 된다."
제삼자의 눈으로 바라보면 세 명 다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진 않는다. 그러면 어떠랴. 셋이 모임을 하면서 뭔가 연대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시내의 집에 가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층간소음을 연구한다. 시내의 윗집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데 시내의 피해망상 때문에 오히려 윗집에 사는 두리가 고통받는다. 셋과 두리는 그동안 쌓인 오해를 풀게 된다.
그리고 두리가 모임에 합류한다. 사실 두리는 저장강박증이 있어서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고 집에 쓰레기를 쌓아놓은 사람이다. 넷은 연대감을 발휘해 두리의 집을 청소한다. 50리터 쓰레기봉투 열두 묶음이 나왔다.
그리고 넷은 밤새 맥주를 마시며 서로의 내밀한 이야기들을 나눈다. 생의 위기에 처해 있는 네 사람은 이 모임을 통해 자신이 살아있다는, 그리고 서로를 살린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역시 대세 예소연! 조심스레 이 소설로 2025년 문학상을 여러 개 수상하겠다는 예측을 해본다. 최애 성해나 작가님이 조심스레 설계도를 그리며 사건과 인물을 쌓아 올리는 방식이라면 예소연 작가님은 막 쌓는 것 같은데 어느새 다 연결되어 있고 확실한 메시지가 드러난다. - 연대를 통한 '살아 있음' -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그 개와 혁명>보다 이 작품이 난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