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학습과 지식교육의 균형에 대하여
대안학교에서는 늘 '경험'이 중심에 있었다. 교실 밖의 삶을 배우고, 손으로 만들고, 발로 걷고, 몸과 마음으로 부딪히며 성장하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여겼다. 실제로 많은 아이들이 대안학교에서 '살아있는 학습'을 경험했다. 자기 선택으로 프로젝트를 꾸리고, 공동체 속에서 일의 의미를 익히며, 타인과의 갈등을 통해 관계를 배워갔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나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과연 이 많은 경험이 학습으로 연결되었는가? 경험은 분명했지만, 그 경험을 성찰하고 개념화하여 지식으로 전환하는 구조는 허술했다. 학생들은 '많이 했다'고 말했지만, 그것이 '배운 것'이 되지는 않았다. 교사들에게는 경험을 정교한 성찰로 연결시킬 수 있는 '연구할 시간'도, 그를 뒷받침할 '재원'도 부족했다.
교육심리학자 데이비드 콜브(David Kolb)는 경험학습이란 단순한 체험이 아닌 '성찰적 순환'이라고 말한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학습은 ① 구체적 경험 → ② 반성과 관찰 → ③ 추상적 개념화 → ④ 새로운 적용이라는 네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대안교육 현장에서는 첫 단계만 넘쳐났고, 그 이후의 성찰과 구조화, 적용은 대부분 학생 개인의 몫으로 남겨졌다.
내가 머물던 학교에서도 강사들의 조언이 이어졌다. “아이들이 자율성과 창의성은 있지만, 사유의 힘이 약하다.” “책은 좀 읽혀야 하지 않겠냐.” “기초가 부족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 지적을 해결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전환점은 느린학습자와의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어느 날, 학교의 가정 방문 중 보육원에 살고 있는 아이를 찾아갔다. 아이를 돌보고 있는 사회복지사님과 면담을 했다. 그 아이는 공동체 안에서 자주 다투고, 자기 주장만 고집하며, 친구들과 갈등을 반복하고 있었다. 복지사님은 아이가 친구들과 계속 반목하면 관계가 악화될 것을 걱정하며, 아이의 상황을 또래 친구들에게 설명해보면 이해를 도울 수 있지 않겠냐고 제안하셨다. 나는 그것이 오히려 낙인을 찍는 결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그 결정을 보류해달라고 부탁드렸다.
대신, 우리는 비밀 과외를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은 모르게, 느린학습자를 이해하고 지원할 수 있는 강사를 섭외해 국어와 수학을 가르쳤다. 어휘력과 논리력을 바탕으로 생각을 표현할 방법을 찾아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 학교는 대부분의 수업이 의사소통 중심이었기에, 그 아이는 논의 참여가 어려웠다. 하지만 점차 룰에 맞춰 회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했고, 지금은 바리스타로 일하고 있다.
처음엔 그 경험이 우연이라 여겼지만, 작년에 비슷한 상황을 또 마주했다. 유아기부터 대안학교에서 자란 아이였다. 그녀는 소통이 어렵고 과제를 수행하는 속도도 느려 또래 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친구들은 그녀를 '동생 취급'했고, 아이는 그게 매우 불쾌하다고 토로했다.
결국 그녀는 오랜 시간을 보냈던 공동체를 떠나 일반 고등학교로 진학했지만, 학교생활은 고역이었다.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고, 친구도 사귀지 못한 채 혼자 점심을 먹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심리검사 결과, 말하지 못한 마음의 상처들이 쌓여 있었고, 언제 터질지 모를 상태였다.
그 아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 나는 마침 일을 쉬고 있던 터라 친구에게 제안했다. “내가 아이의 튜터가 되고 싶어. 주 2회, 언어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면 좋겠어.” 아이도 반신반의하며 동의했다. 그렇게 우리는 공부를 시작했다.
대화를 나누며 나는 아이의 어휘력과 논리력이 낮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단지 생각을 표현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 자체가 언어로 구조화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사소통의 문제는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지식과 사고력의 문제였다.
처음에는 언어치료를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국어 시험을 잘 보고 싶어요.” 그래서 기초 어휘 학습과 국어 공부를 병행하기로 했다. (다행히 나는 대안학교 초기, 생활비 마련을 위해 국어 강사로 일한 경험이 있었다.)
단어의 개념, 문장의 구조, 논리의 순서를 함께 익혀갔다. 중요한 건 이 학습이 아이의 필요에서 출발했다는 점이다. 처음엔 한 문장도 이해하지 못하던 아이가 국어 지문을 읽고 문제를 푸는 데 성공하기 시작했다. 문제 풀이를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는 과정'으로 여기면서, 아이는 점차 언어의 집을 짓기 시작했다.
성적은 조금 올랐지만, 그것만으로도 효능감이 생겼다. 그동안 존재 자체로 사랑받고 칭찬을 들으며 자랐지만, 아이는 늘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이제는 '스스로 성취한 경험'이 자존감을 채우기 시작했다. 1년이 지나자 아이에게 친구가 생겼고, 언어의 집에 친구를 초대할 만큼의 자신감도 생겼다. 티키타카가 가능해진 것이다.
놀랍게도 언어력뿐 아니라 인지력, 집중력, 자존감 모두가 향상되었다. 이후 나는 느린학습자 대상 교육 개입이 실제로 IQ와 인지능력 향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들에 대해 확인하게 되었다. 나는 그것을 느린학습자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절실히 배웠다. 지식은 단지 머리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언어를 만들고, 세상과 연결되는 문을 여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러한 고민은 자연스럽게 교사의 역할에 대한 재사유로 이어졌다. 나는 오랫동안 학생의 주체성을 강조해왔다. 대안교육에서는 교사의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믿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 방향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경험을 통해 나는 깨달았다. 자율성과 경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이들이 세상과 소통하고 스스로를 이해하며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언어적 구조와 개념적 사고, 즉 지식의 토대가 필수적이다.
교육철학자 비에스타(Gert Biesta)는 “가르침 없는 배움은 없다”고 말한다. 학생이 주도적으로 세계와 만나는 과정에는, 교사의 보이지 않는 설계와 정교한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개입은 단지 감시하거나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고 성찰할 수 있도록 돕는 지식적 틀을 제공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대안학교에서 우리는 어떤 지식을, 어떤 방식으로 제공해야 할까? 모든 것을 새롭게 창조하려고 하기보다, 나는 이제 시중에 존재하는 '일반학교용 지식'을 대안학교 안에서 재구성하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이는 시간과 자원이 제한된 현실 속에서, 교사가 현실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접근이기도 하다. 아이들과의 대화 속에서 기존의 지식은 새롭게 의미화되고 해석될 수 있다. 지식은 삶과 연결될 때 살아 움직이기 때문이다.
경험과 지식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의 균형을 고민해야 하고, 그 균형을 만들어가는 교사의 존재 방식 또한 이제는 새롭게 설계되어야 한다.
위 글은 민들레출판사의 계간지 <민들레 Vol. 157: 교사는 가르칠 수 있을까>에 수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