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이해한다는 착각

by 우소연
사진: Unsplash의Stephanie Klepacki


이해를 오해하다


영어로 ‘이해하다’는 뜻의 understand는 고대 영어 understanden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under’는 ‘기초로 삼다’, ‘지탱하다’는 의미였다. 즉 understand는 '무언가를 서서 지탱할 만큼 충분히 파악하다'는 뜻에서 파생한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 단어를 ‘under(아래에) + stand(서다)’로 오해하고 있었다. ‘이해’란 상대보다 위에 서서 아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 서서 듣는 태도라고 믿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착각은 단순한 언어의 오류가 아니라 삶의 태도에 대한 관찰이었던 것 같다. ‘이해’는 어원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도 수많은 착각과 오해로 가득 차 있다.

특히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아이가 고통을 말하면 나는 쉽게 말했다. “그래, 나는 네 마음을 이해해.” 진심이었지만 '그 말이 정말 아이에게 닿은 적이 있었던가?' 반문하게 된다. 교사가 “이해한다”라고 말하는 순간, 아이의 삶은 해석되고, 단정되고, 침묵 속에 갇히기도 한다.

그 이해가 오히려 ‘오해’였음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나의 교사로서의 여정은, 지금 돌아보면 이 깨달음을 얻기까지 수많은 '오해'의 시간이었다. 그 오해의 시간을 자각하게 만든 두 번의 깊은 경험이 있었다


오해를 깨닫게 한 순간들


첫 번째는 학교 밖 청소년들과 함께 컵케이크 매장을 운영하던 시절이었다. 그곳은 ‘일하며 배우는 학교’, 아이들과 교사가 함께 생계를 꾸리며 살아가는 공간이었다. 나와 너를 살리는 자립'을 할 수 있도록 나는 교사이자 매장의 대표로, 아이들과 함께 새벽부터 밤까지 일했다. 주문이 밀릴 때면 밤을 새워 케이크를 굽고, 배달통을 들고 서울 시청으로 향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배달 대기 중 시청 건물 앞에 서 있었을 때, 문득 내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예전엔 서울시와 정책을 논의하기 위해 회의하러 오던 ‘교사’였는데, 이제는 배달원이었다. 무언가 위축된 마음으로 사무실 문을 지나고, 직원의 무심한 응대를 받으며 나는 깨달았다. “지금 나는 교사가 아니라, 생존의 현장에 서 있다.” 매장은 끝내 경영난과 팀워크의 균열로 문을 닫았다.

아이들과 사회적 기업을 만들기 위해 젖 먹던 힘을 다해 노력했다. 전력을 다해 '담담하게 먹고살며 나와 너를 살리는 일'을 성공시키고 싶었다. 아이들의 자립을 열망했다. 이를 위해 나는 박사과정도 멈췄고, 월급도 아이들과 똑같은 백만 원을 받으며, 삶 전체를 걸고 일했다. 그 끝에 남은 건 실패였고, 몸도 마음도 삶도 파산에 가까웠다.

억울했고, 괴로웠고, 욕이 절로 나왔다. 그 순간, 문득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늘 욕을 입에 달고 살던 아이들. 나는 그저 그 아이들을 나무랐지만, 이제야 알았다. “욕이란, 세상을 향한 약하면서도 가장 강한 언어였구나.” 아이들이 욕을 한 건 (아이들이 언어로 설명할 수 없었을지라도) 바꿀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아이들의 마지막 외침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번째 경험은 그 실패 이후, 다시 청소년 센터에서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였다. 위기 청소년들을 돕는 대안학교에서 나는 인터뷰를 통해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부모 없이 자란 아이, 가정 폭력으로 도망쳐온 아이, 부모의 사고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아이… 그중 한 아이가 쓴 에세이를 읽으며 나는 멈춰 섰다. “선생님의 제 삶을 이해하시나요? 그렇게 살아보신 적 있나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부분에서는 제가 당신의 선생님입니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는 겪지 않은 일을 너무 쉽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너의 삶을 모른다. 내가 겪은 고통과 너의 고통은 같을 수 없다." 교사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묻는 일이었다. 아이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돌부리를 치워가는 사람. 그것이 내 자리다.


이해보다는 경청


철학자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는 『오리엔탈리즘』에서 이해가 때때로 지배와 재단의 도구가 된다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누 국가를 이해했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무의식 중에 그 사람을 우리의 방식대로 해석하고 틀에 가둔다. 그래서 내가 교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나는 너를 모른다'라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교사인 내가 학생을 만날 때 할 수 있는 '교육의 첫 시작'이 되어야 한다.

아이들을 침묵에서 만나지 않기 위해, 먼저 스스로의 권력을 내려놓아야 한다. 철학자 파커 파머(Parker J. Palmer)는 이해는 기술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앎으로 피어나는 것이라 말했다. 교사에게 필요한 것은 관계의 긴장과 침묵까지 함께 머물 수 있는 용기다. 나는 여전히 아이들을 오해한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교사는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경청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understand라는 단어를 오해했던 그 시절의 나처럼, 나는 아이보다 한 발 낮은 위치에서 서 있으려는 마음,

그 마음이야말로 진짜 이해의 시작이라고 믿는다. 아이들은 설명되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 교사는 그 삶을 해석하려 하지 말고, 곁에 서 있으려 애써야 한다. 나는 여전히 모른다. 그래서 묻고, 그래서 듣는다. 그리고, 그 곁에 서 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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