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표는 언제부터 만들어졌을까? 19세기 초 영국의 한 공립학교가 시작이었다고 한다. 마을에는 거대한 방직공장이 있었는데, 새벽 6시 사이렌이 울리면 노동자들이 줄지어 들어가고 감독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모두 똑같이 움직였다. 이를 본 교장은 “아이들도 시간에 맞춰 움직이게 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교실마다 있던 작은 종 대신, 공장과 같은 시간에 맞춰 울리는 큰 종을 달았다. 종이 울리면 아이들은 줄을 서서 교실로 들어갔고, 종이 울리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산업혁명 시대에 ‘교시’로 쪼개진 수업과 쉬는 시간, 종이 신호를 주는 구조가 완성됐다.
19세기말, 대규모 공교육 체제는 급속한 산업화와 함께 등장했다. 미국 교육학자 랄프 타일러(Ralph Tyler)가 정리한 목표·내용·방법·평가 중심의 ‘관리형 교육과정 모델’은 당시 대량생산 공장 시스템과 맞물려 학교를 표준화된 ‘지식 생산 공장’으로 만들었다. 학생은 표준 시간표 속에서 동일한 과제를 수행했고, 교사는 생산 라인의 관리자처럼 그 과정을 통제했다. 푸코(Michel Foucault)는 『감시와 처벌』에서 학교·병원·감옥을 “동일한 통치 기술이 적용된 판옵티콘적 공간”으로 보았다. 모두가 한눈에 보이는 구조에서, 시간과 공간은 권력을 작동시키는 도구였다. 학교 종과 시간표는 그 상징이었다.
시간표는 인간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하는 수단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학교에서부터 그것을 자연스러운 삶의 리듬처럼 받아들이도록 훈련받아왔다. 문제는 이 구조가 여전히 현재형이라는 점이다. 한국의 모든 초·중·고는 「초·중등교육법」과 그 시행령, 그리고 교육부 고시에 따라 교육과정을 편성한다. 학교는 매 학년도 190일 이상의 수업일수를 확보해야 하고, 교과별 주당 수업 시수 또한 법으로 정해져 있다. 예를 들어 초등 저학년은 연간 약 720시간, 고학년과 중·고등학교는 약 1,020시간 안팎의 수업을 의무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이처럼 시간표는 학교가 자율적으로 짜는 운영 방식이 아니라, 법으로 강제되는 제도적 구조다. OECD 평균(초등 805시간, 중등 916시간)과 비교해도 한국은 상대적으로 높은 시수를 유지하고 있어, 교육이 여전히 시간표 중심 구조에 뿌리내려 있음을 보여준다. 표준화는 안정성을 주지만, 동시에 변화와 창의성을 가로막는다.
대안학교 초기에 나는 공교육의 구조에 질문을 던지며 캠프 형식의 실험을 자주 했다. 그중 하나가 ‘시간표 없는 학교가 가능한가’였다.
방학 전, 학부모들과 생태캠프를 준비했다. 충청도 대곡 분교 주변의 환경을 교육 자원으로 삼았다. 생태 전문가와 함께 마을 곳곳을 다니며 꽃, 곤충, 물가의 생물을 조사했고, 아이들이 놀이로 배울 수 있도록 생태 놀이를 익혔다.
그리고 교사들과 약속했다. 아이들의 리듬에 따라 움직인다. 시간표는 없다.
캠프가 시작된 날, 오래된 운동장엔 낮은 풀 냄새가 가득했고, 창문 너머로 매미 울음이 쏟아졌다. 해가 운동장 모서리를 비출 때쯤 아이들이 삼삼오오 나왔다. 어떤 아이는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어떤 아이는 이마에 햇빛을 가득 받으며 하루를 열었다. 밥은 배고플 때 먹었고, 쉬고 싶으면 쉬었다. 함께 산으로, 들로, 물가로 걸었다.
교사들은 종이, 사인펜, 반창고 같은 준비물을 가방에 챙겼다. 아이들이 놀다 지루해질 즈음 칡잎으로 가방을 만들고, 무언가 그리고 싶어 하면 종이를 꺼내 꽃이든 곤충이든 그릴 수 있도록 준비했다.
첫째 날은 마을 어르신들께 인사를 다녔다. 심심하던 동네 아이들이 자연스레 합류했다. 그중 한 명이 별명을 ‘경찰’로 지어 달라 했다. 할머니와 사는, 에너지가 넘치는 개구쟁이였다.
둘째 날 아침, 경찰이 산에 같이 가자고 했다. 교사들은 이미 답사한 길로 안내하려 했지만, 경찰은 “내가 아는 좋은 길이 있다”라고 했다. 답사하지 않은 길이라 내심 당황했지만, 아이들은 호기심으로 눈이 반짝였다.
경찰을 따라나선 길은 험하고 볼거리도 없었다. 숨이 차고 아이들은 지쳐갔다. ‘오늘은 망했다’는 생각이 들 즈음, 작은 동산이 열리며 파란 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다. 동산 앞에는 무덤이 있었다. 경찰이 말했다.
“여기가 우리 아빠 무덤이야.”
순간, 모두가 조용해졌다. 한참 동안 무덤 곁에 서 있었고, 멀리 보이는 산등성을 손가락으로 그리며 바라봤다. 우리는 “동산 위에 올라서서 파란 하늘 바라보며”로 시작하는 노래를 불렀다. 바람에 실린 노래가 경찰의 마음에 닿기를 바라며.
준비한 놀이는 거의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배우고 있었다. 나 역시 배웠다. 나무와 숲,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것.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배움이었다.
돌아보면, 대곡 분교의 하루는 단순히 ‘시간표 없는 교육’이 아니었다. 교사들은 캠프 전 수차례 답사를 하며 마을의 길과 식물, 놀이 가능성을 세세히 준비했다. 그러나 그 치밀한 계획은 현장에서 우연을 만나 새로운 빛을 발했다. 경찰과의 만남, 그리고 그 길에서의 노래는 어떤 계획에도 없던 순간이었다.
이것이 브로콜라주 교육과정(Bricolage Curriculum)의 힘이다. 손에 잡히는 재료를 엮어 새로운 것을 만드는 브로콜라주처럼, 교육에서도 ‘계획된 틀’과 ‘현장의 우연’을 엮어 그 순간 가장 적합한 학습을 만든다. 준비된 교사의 눈과 손이 우연을 배움으로 바꾸는 것이다.
교육학에서도 ‘우연성’은 중요한 자원이다. 진로교육에서 주목받는 우연이론(Planned Happenstance Theory)이 그 예다. 크럼볼츠(John Krumboltz)는 진로 형성에서 예측 불가능한 사건과 만남이 개인의 경로를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말한다. 우연을 피하거나 없애려 하기보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활용하는 역량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대곡 분교의 하루도 그랬다. 설계된 생태교육의 뼈대 위에, 예기치 못한 만남과 경험이 더해졌다. 우연은 계획의 빈틈이 아니라, 계획을 살아 있게 하는 숨구멍이자 새로운 배움이 자라는 씨앗이었다.
학교 시간표는 대량시스템 시대에 적합한 구조였다. 하지만 개별 맞춤형 학습이 중심이 되는 AI 시대에도 유지될 필요가 있는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이미 세계 곳곳에서는 ‘시간표를 느슨하게 하거나 폐지하는’ 실험이 늘고 있다.
핀란드: ‘현상기반 학습(Phenomenon-based Learning)’으로 교과 경계를 허물고 하루·한 주 단위 프로젝트 몰입 수업 진행.
미국 서드 도어(Third Door): 학생이 하루 일정을 자율 설계, 교사는 퍼실리테이터 역할만 수행.
뉴질랜드 디스커버리원 스쿨(Discovery One): 전교생이 개별 학습계획을 세우고, 종·교과·학년 구분 없이 학습.
AI 기술은 이 흐름을 가속화할 수 있다. AI 튜터는 학습자의 속도·흥미·상황에 맞춰 콘텐츠와 과제를 추천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학생의 자율성이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학생들이 학습 내용이나 과정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때 학업에 대한 몰입과 과제 수행 의지가 뚜렷하게 향상된다. 예컨대, 자율적으로 수업 참여를 선택한 학생들은 더 열정적으로 참여했고, 네덜란드 중등학교의 현장 실험에서는 학습 계획과 과정 평가 능력이 강화되었다는 결과가 보고되었다. 또한 자기결정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에 따르면, 자율적 동기를 지닌 학습자는 성취도가 높을 뿐 아니라 학습에 대한 흥미와 정서적 활력도 크다. 시간표는 절대적 규칙이 아니라, 학습자가 스스로 조율하는 ‘리듬’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배움은 더 깊어지고 오래 지속된다.
대안학교는 작은 규모와 제도적 유연성 덕에 이런 실험에 유리하다. 그러나 최근 제정된 대안교육지원법은 교육청 인증 과정에서 ‘시간표에 따른 교육과정’ 제출을 요구한다. 안정성을 위한 제도지만, 동시에 미래 교육의 씨앗이 될 실험성을 약화시킨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교육은 단지 시간표를 없애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아이가 자기 시간을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진짜 목표다. 교육이 교과서 속 죽은 지식이 아니라, 마을과 사람, 자연과 환경을 재료로 삼아 생생한 삶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미 쌓아온 교육 자산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보편적 기준을 마련하는 일. 대안학교가 제도 안에서 이를 어떻게 품어낼지에 대한 새로운 상상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동안 가지 않은 길을 수없이 걸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거대한 제도에 휩쓸려 가지 않으면서 '대안답게' 제도를 만들어가려면, 우리는 어디서부터 다시 설계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