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람들은 질문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학교에서도 질문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의문이 생긴다. 아이들에게 질문을 가르치는 교육은 과연 무엇일까? 학교 교육은 아이들이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지식을 전달하는 방식인데, 과연 질문을 통해서도 교육이 가능할까? 정답을 찾는 법을 가르치듯 질문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뜻일까?
나는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힌트를 얻었다. “네 마음속에 아직 풀리지 않는 모든 문제들에 인내심을 가지고, 질문 안에 머물라”는 그의 조언처럼, 교육은 정해진 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풀리지 않는 질문과 마주하는 시간이다.
경험이 적은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일은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학교 교육은 경험의 압축적인 지식을 전달하며 아이들을 성장시키는 데 초점을 맞춰왔으니까. 하지만 스스로에게 물어본 적이 있는가? “아이들에게 학교를 가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 왜 학교에 가는지, 어떤 면에서 학교를 다니고 싶은지 물어본 적이 있는가?”
나 역시 이 고민을 안고 학교 밖 청소년 대안학교를 운영했다. 4월과 8월, 검정고시 시즌이 되면 학생들은 학교에 나타났다가 시험이 끝나면 사라지곤 했다. 마치 학교가 ‘시즌 상품’처럼 느껴졌다. 고민 끝에, 학생들에게 ‘학교가 필요한 곳’이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그리고 그들의 대답을 토대로 학교 시스템 자체를 재구성해보기로 했다.
교사와 학생들에게 전체회의를 제안했다. 그날 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너희는 학교에 왜 다니니?" “학교는 너희들이 건강한 시민으로 자라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어. 너희도 마찬가지니?" 아이들은 "아니요"라고 했다. 그럼 "너희가 학교에서 바라는 것은 뭐니? 왜 학교에 다니고 싶니" 아이들은 당황했는지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그때 필리핀에 살다가 학교에 입학 한 아이가 말했다.
“빅 픽처를 갖기 위해서요!”
아이들의 웅성거림은 더 커졌다.
"빅 픽처가 뭐야?"
나는 스마트폰 검색 찬스를 써보라고 했다.
“꿈같은 거네”
“나도 내 미래가 궁금해”
"나도 내 꿈을 찾고 싶어!"
순식간에 이야기에 생기가 돋았다.
"모두 빅픽쳐를 갖고 싶은거야?"라고 물으니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대화는 곧 가다머(Hans-Georg Gadamer)가 말한 ‘지평의 융합(Fusion of Horizons)’이었다. 세상의 절대적 진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대화의 과정 속에서 세계를 확장하는 것이라는 그의 말이 와닿는 순간이었다. 경험이 적은 아이들일지라도, 그들 각자의 삶의 지평에는 자신만의 진실과 생각이 담겨 있었다. ‘학교에 다니는 이유’를 묻는 질문 앞에서, 아이들은 침묵의 장막을 걷어내고 자신의 지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의 지평은 교사의 지평과 부딪히고, 또 서로의 지평과 얽히면서 ‘빅 픽처’라는 새로운 의미의 지평을 함께 만들어냈다.
이러한 대화와 숙고의 과정을 통해 우리 학교의 교육 목표는 “청소년들이 꿈을 이루어가는 곳”으로 결정되었다. 아이들은 기꺼이 찬성했고, 다음 질문으로 이어졌다. “그럼 어떻게 해야 꿈을 이뤄갈 수 있을까?” 아이들의 의견을 반영해 ‘경험과 체험반’, ‘꿈이룸 반’, ‘진학과 진출반’을 만들었다. 학년 구분 없이 학생들은 스스로 원하는 반을 선택했고, 반 운영에 참여할 교사들까지 직접 추천했다.
학생들과의 대화만큼 중요했던 것은 그 결과를 실제로 실천에 옮기는 일이었다. 나는 일본 연수에서 방문했던 ‘유우스키나미’라는 청소년 센터를 떠올렸다. 그곳에는 10개가 넘는 자판기가 있었는데, 센터를 지을 때 청소년들에게 원하는 것을 물었고, 대답에 쓰인 자판기를 모두 설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무모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이 사례에서 진정한 대화의 두 번째 원칙을 발견했다. 대화의 과정에서 현실적 한계를 함께 논의하되, 합의된 사항에 대해서는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해 실현하려는 의지 말이다. 그래야 함께 나눈 대화에 신뢰가 생기고 아이들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때로 아이들이 제안한 수업 내용이 예산이 많이 드는 것도 있었고, 때로 교육적이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아이들이 경험을 통해 알아가길 바랐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스스로의 목소리를 갖고, 스스로 말한 것을 책임질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것이었다. 그 결과, 검정고시만 보고 나면 뿔뿔이 흩어졌던 아이들이 학교에 매일 나왔다. 대안학교의 그해 결석률은 10% 미만으로 떨어졌다. 자신이 원하는 반을 스스로 선택했고, 교실 안에서는 다시 학기별 교육 과정을 논의했다.
우리 교사들은 아이들과 지속적으로 대화하고 대화를 구조화할 수 있도록 공부하기 시작했다. 퍼실리테이션 교사 연수를 자체적으로 실시하고, 교사가 퍼실리테이션 전문가와 컨설팅을 받으면서 교사 스스로도 발전해 갔다. 교무실과 복도에 아이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학교 건물은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놀랍게도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졌을 뿐인데, 그들은 적극적으로 학교의 주인이 되어갔다. 시험만 끝나면 뿔뿔이 흩어지던 아이들이 교무실로 모여들었고, 선생님들 책상 앞에는 기웃거리는 아이들이 빈번해지자 옆에 의자가 하나씩 생겼다. 아이들은 교사가 일하는 옆에 앉아있는 것을 즐겼다. 우리는 좋은 친구이자 성장하는 동반자가 된 것이다.
이러한 대화와 협의의 과정은 학생들의 요구를 수렴하는 것을 넘어, 민주주의의 핵심인 ‘숙고’와 ‘합의’를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다. 하버마스(Habermas)가 강조한 민주시민 교육은 ‘합리적 의사소통의 과정’이다. 아이들과 학교의 일에 대해 논의하고 실천하는 과정은 단순한 교육 참여를 넘어, 건강한 시민으로 성장하는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 합리적인 사고, 차이를 조정하는 경험이 교실 안에서 자연스럽게 쌓였다. 학교에 애초에 목적하였던 '건강한 시민으로의 성장'이 이루어진 것이다.
교육은 일방적인 지시가 아닌 대화로부터 시작한다. 정답을 외우게 하는 대신, 아이들을 믿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도록 개방할 때 아이들은 비로소 입을 연다. 한 명 한 명이 발화한 그 말속에 자신만의 길을 찾는 나침반이 있다. 교육은, 이렇게 질문에서 시작된다. 릴케의 말처럼 질문 안에 머무르는 동안 '저절로' 답을 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