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사라짐은 아이의 탄생이다

by 우소연



길잡이 교사에서 시작된 질문


우리는 교사의 존재를 오랫동안 ‘가르치는 사람’, ‘앞에 서는 사람’으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대안학교에서 교사는 ‘동행하는 사람’으로 불린다. 그래서 ‘길잡이 교사’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초기 대안학교들은 기존 교육이 재생산해온 권위적인 교사의 모습을 넘어, 새로운 관계성을 실험하고자 했다.

학생과 교사가 별명을 나누고, 존댓말을 줄이는 등의 시도는 위계가 아닌 평등한 관계를 만들기 위한 실천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교사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하긴 어렵다.

대안학교에서는 학생과 학부모, 교사가 평등한 주체로 존재하지만, 교육과정과 운영에 대한 실질적인 권한은 교사에게 주어졌다. 공교육을 떠나 새로운 교육을 실험하려는 교사들의 진정성과 전문성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학부모가 주도해 설립한 대안학교에서도 교사의 전문성이 인정되며 문화가 형성되었다. 교사들은 늘 최선을 다해 교육을 고민했다.

나 역시 학부모들과의 교육 협력을 중요하게 여겼지만, 수업 구성은 여전히 교사 주도적이었다. 그때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학교의 핵심 주체인 학생의 목소리는 어디쯤 위치해 있는가? 학부모와 학생들은 학교 운영에 참여하고 있었으나, 정작 교육 장면에서는 학생들이 어떻게 참여하고 있는가? 교사의 전문성과 아이들의 자율성은 어떤 균형점에 놓여야 하는가?

어느 순간부터 나는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정말 그렇게 있어야만 하는 걸까?”

교사는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오랫동안 내 안에 머물렀고, 그 답은 뜻밖에도 독일의 어느 유치원에서 찾아왔다.


발도로프 유치원에서 배운 ‘한 걸음 뒤의 교육’


나는 교직과정을 밟지 않은 사람이었기에 늘 교육에 대해 탐구하며 배워야 했다. 가장 열심히 참여했던 것은 발도로프 교사 교육이었다. 발도르프 학교가 한국에 소개되던 초기, 나는 관련 모임에 참여했고, 슈타이너교육예술협회가 설립된 후 처음 열린 교사 연수에 참석했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도로프 대학 교수들의 강의를 들으며 2년 차 겨울엔 현지 발도로프 유치원을 참관하는 기회를 얻었다.

그 유치원 참관 수업에서의 경험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나는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나무 블록을 함께 쌓고 부수며 놀았고, 아이들은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유치원 원장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통역을 맡은 교수님을 통해 원장과 면담을 요청했고, 다음 날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원장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아이들의 세계에 너무 깊이 개입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한 걸음 뒤로 물러나야 합니다.”

그 말은 충격이었지만 분명했다. 내가 개입함으로써 아이들은 스스로 해보는 기회를 잃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태도를 바꾸기로 했다.

그날, 전날 함께 놀았던 네 살 안톤이 다가왔다. 나는 그에게 옷을 입히고, 모래 놀이터에 데려다준 뒤 조용히 자리를 비켰다. 안톤은 삽을 들고 놀이를 시작했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보았다. 아이는 내 도움 없이도 자기 세계를 만들고 있었고, 친구들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내가 개입하지 않았을 때, 아이의 생각과 감정, 움직임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그날 이후로 나는 ‘교사의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교사가 앞에 서서 가르치기보다, 공기처럼 곁에 머무는 존재.
눈에 띄지 않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사람.

교사의 부재는 아이에게 방임이 아니라, 주도성을 회복하게 하는 과정이었다.

초등 대안학교를 운영하던 시절, 청년이 된 제자가 내게 말했다.
“우짜짜, 나는 그때가 제일 행복했어. 제가 세상을 만든 기분이었거든요.”

그 시절, 우리는 산속에서 아이들을 풀어놓고 놀이와 집 짓기를 했다. 가장 힘주지 않았던 그때, 아이들은 가장 주도적이었다.


사라진다는 것은 아이의 삶에 스며드는 것


발도르프 교육은 아동을 ‘스스로 과제를 가진 존재’로 본다. 타고난 기질은 그 과제를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되며, 교육은 그 과제를 발견하고 펼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다.

전통 교육이 아이를 텅 빈 존재로 보고 지식을 주입했다면, 발도르프 교육은 아이 안의 가능성을 믿는다. 프레이리는 교사를 지식 전달자가 아닌 ‘대화의 참여자’로 보았고, 비에스타는 교육에서의 ‘주체성의 역설’을 짚는다. 가다머는 인간을 ‘해석하는 존재’라 하며, 교육은 해석의 틀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일이라 말한다.

결국 교육은 정답을 주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해석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이 말을 꺼낸다.
“교사는 사라져야 한다.”

사라진다는 것은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을 바꾸는 일이다. 교사가 ‘보이는 돌봄’이 아니라 ‘느껴지는 안전함’을 줄 때, 아이는 자신의 언어로 세상을 말하기 시작한다.

발도로프 유치원에서 내가 사라졌을 때, 안톤은 자립했고, 놀이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나의 부재가 아니라, 아이의 탄생이었다.

교육은 늘 긴장 속에 있다. 돌봄과 방임 사이, 주도성과 전문성 사이. 그러나 교사가 그 긴장을 감내할 수 있을 때, 아이는 처음으로 자기 발로 걷는다.

학교는 교사를 위한 공간이 아니다.
학교는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다.
무대의 주인공은 교사가 아니라 학생이다. 우리는 이제 무대에서 내려와야 한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있었지만,
내가 없는 듯한 순간이 가장 충만했다.

교사가 사라졌을 때, 아이는 비로소 자기 언어와 삶을 만들기 시작한다.
교사는 때로 손을 놓는 법을 배우고, 말 대신 기다림으로 말해야 한다.
그것은 나의 부재가 아니라, 아이의 탄생이다.

아이가 자기 목소리로 세계를 해석하는 순간,
교사는 비로소 제 자리를 찾는다.
존재하되 드러나지 않는 이 묵묵한 태도,
그것이 아이의 삶을 감싸는 ‘느껴지는 안전함’,
그리고 ‘존재하되 사라지는 교사’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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